특별한아리랑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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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서울아리랑상 시상식-호머 헐버트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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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양, "영화 주제가 <아리랑> 연구"영화 주제가 <아리랑> 연구 논문요약 이 논문은 영화 주제가 <아리랑> 연구를 통해 ‘주제가 <아리랑>’ 사설이 형성되는 상황과 사회문화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살펴본다. 이 과정에서 주제가 <아리랑>의 의미와 특성을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새로운 아리랑인 ‘주제가 <아리랑>’이 근대 미디어에 의해 사회문화적으로 대중화 되는 과정에서 대중문화예술 전 분야로 확산되는 성격변화를 거치는데, 이러한 배경에서 주제가 <아리랑>은 모든 아리랑을 지칭하는 대표성을 부여받아 ‘아리랑’으로 통칭된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아리랑’의 문화적 코드에 대해 이해해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최종적으로는 ‘아리랑’이 어느 시점에선가 남과 북, 그리고 한민족 동포사회에서 ‘민족공동체의 동질감과 사회적 통합을 갖기 위한 기저로 작용하여 상징적 지위를 부여받게 된 것을 규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 논문에서는 이러한 점에 유의하여 일차적으로 일반적으로 오래 전부터 불리어진 전통 민요로 잘못 알고 있었던 주제가 <아리랑>의 형성배경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민요로써의 <아리랑>, 주제가로써의 <아리랑>을 분석한다. 이를 위해서 나운규가 감독한 영화 <아리랑>과 주제가 <아리랑>에 대해 근대의 시각으로 심도 있게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그동안 영화 <아리랑>의 작품론, 작가론 등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있어 왔다. 그러나 민요 아리랑과 주제가 <아리랑>, 주제가 <아리랑>과 영화 <아리랑>은 불가분의 관계인데도 학계에서는 각각 개별적인 연구에만 머물러 왔다. 이 논문은 영화 서사구조 속에서 영화적 장치에 의해 의도적으로 작용하여 불리어지는 주제가 <아리랑>의 특성을 도출하려고 한다. 더불어 영화의 인기와 장기상영에 의해 주제가 <아리랑>이 사회문화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주제가 <아리랑>의 성격 변화를 규명하는, 주제가 <아리랑>에 대한 융합(hybrid)연구이다. 나아가 선행연구의 문제점을 보완하여 그동안 국문학계, 영화학계, 민속학계, 음악학계 등에서 서로 타자의 입장에서 방치해왔던 주제가 <아리랑>에 대한 통합적인 연구를 기대해 본다. 연구의 시각과 방법론은 영화 개봉 1926년을 기점으로 하여 이전의 ‘전승 아리랑’ 상황을 개괄하여 주제가의 형성과정을 인식하고, 영화 서사 구조 내에서 작용하는 주제가의 기능과 의미를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영화개봉 전후 관련 자료와 나운규와 당시 영화 관계인들의 증언을 통해서, 기존의 4절과 발굴된 5절의 주제가 전 9절이 ‘나운규 작사, 김영환 편곡으로 이루어 졌고, 주제가 각 절이 영화적 장치에 의해 서사 구조 속에서 의도적으로 배치되어 불려졌음을 재구성하여 확인하여 본다.ABSTRACTA study on the cinema Theme Song <Arirang> Kee Mee Yang Korean Language & Literature Sungkyunkwan University This study examines the conditions for the formation of the editorial of the 'Theme Song <Arirang>' and the process of it to expand socially and culturally by studying the movie Theme Song <Arirang>. Processing this, this study aims at defining the meaning and features of the Theme Song <Arirang>. In the process of the new Arirang called 'Theme Song <Arirang>' being popularized socio-culturally through modern media, it undergoes feature changes that permeates to all sectors of public cultural arts. Under such circumstances, Theme Song <Arirang> is commonly called 'Arirang' as the one that represents all Arirang songs. This aims at understanding the cultural code of 'Arirang' that continues until today based on such background. Through this, it is expected to define the application of 'Arirang' as a foundation for homogeneity of a race and social integration for North and South Korea, and in the Korean emigrant society, while defining how it receives a symbolic position. Considering these points in this study, while examining the background for the formation of Theme Song <Arirang> that was wrongfully known as a traditional folk song, <Arirang> is analyzed as a folk song and as a theme song. For this, there is a need for in-depth inquiry on the Theme Song <Arirang> and the movie <Arirang> directed by Na Woon-gyu from a modern approach. There has already been many studies made on the work and director of the movie <Arirang>. However, despite the fact that the folk song Arirang and Theme Song <Arirang>, and the Theme Song <Arirang> and movie <Arirang> are inseparable, the academic sector has for some reason only made individual studies on them. This study attempts to examine the features of the Theme Song <Arirang> that is intentionally used through cinematographic tools within the film's narrative structure. In addition, this is 'a Hybrid' study on the Theme Song <Arirang> and defines the changes of the features of the Theme Song <Arirang> in the process of which it becomes socio-culturally proliferated through the popularity and long runs of the film. Furthermore, integrated studies on the Theme Song <Arirang> that has been abandoned from the different perspectives of the traditional music sector, cinematography sector, folk study sector and music sectors can be expected by supplementing the problems with preceding studies. The visuals of the study and its methodologies becomes aware of the formative process of the theme song by summing up the situation of 'passed-down Arirang' prior to 1926 when the film was released and analyzes the functions and meanings of the theme song that is effective within the film's narrative structure. Based on relevant information before and after the release of the film and through the testimonies of Na Woon-gyu and film critics, verses 4 and 5 and verse 9 of the theme song were written by Na Woon-gyu and composed by Kim Young-hwan. In addition, it was reconstructed that these verses were intentionally placed in the narrative structure through cinematographic tools.Key Words : Traditional Arirang, Common Arirang, Jabga Arirang, Na Woon-gyu, Movie <Arirang>, Theme Song <Arirang>, New Arirang, Popular Song Arirang, Bonjo Ari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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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리랑 개봉 90주년 기념 나운규아리랑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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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g of Ariran ,그리고 김산 > 문헌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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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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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영상으로 본 ‘아리랑’···민속기록학회 학술대회인쇄하기 닫기 문화 > 문화일반 사진·영상으로 본 ‘아리랑’···민속기록학회 학술대회 등록 2019-06-05 12:44:41 영화 ‘아리랑’(각색·감독·주연 나운규), 1926년 【서울=뉴시스】이수지 기자 = 기록과 영상, 지역기록관과 민속기록의 측면에서 ‘아리랑’을 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열린다.민속기록학회(회장 양종승)가 8일 오후 1시30분 서울 은평구 진관2로 샤머니즘박물관(금성당)에서 춘계학술대회를 개최한다.‘영상문화유산 개념과 새 공공영상문화유산 정책포럼 활동범위’(최효진·한국외대), ‘스틸자료를 통한 영화 아리랑의 재현’(기미양·안동대), ‘영상기록을 통한 디아스포라 실상과 의미-디아스포라 아리랑’(김명기·고려대), 그리고 ‘지역기록관에서 민속자료의 활용’(김덕묵·한국민속기록보존소) 등을 논한다.suejeeq@newsis.com https://newsis.com/view/?id=NISX20181113_0000471707&cID=10701&pID=10700#인쇄하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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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6] 서재필이 기사로 밝힌 ‘애국가’ 작사자서재필이 기사로 밝힌 ‘애국가’ 작사자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6]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7.12.18 11:40:42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1897년 7월 17일 낮 3시, 서대문 독립문 옆 <독립관>에서 조선 개국 505회 경절회(慶節會) 행사가 있었다. 이날은 조선이 개국한 날이라 기념식을 한 것으로, 사상최초의 민관합동 개국 기념식이었다. 강단에는 국기(태극기)를 게양하고 꽃 장식을 하고 하단에는 예복을 갖춰 입은 외국 공관원과 정부 고관들이 자리했고, 객석에는 관인들과 학생들, 그리고 일반인들도 자리했다.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사가 주최했고 정부 재산을 관리하는 탁지부가 재정지원을 했고, 진행은 배재학당 교사와 학생들이 담당했다. 강연은 서재필(독립신문 발행자/1864~1951), 아펜젤라(배재학당 설립자/1858~1902), 윤치호(전 외부 협판/1865~1945) 순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오늘의 애국가 후렴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을 쓴 <National Flower>가 불렸다. 이 노래는 이후 ‘무궁화노래’ 또는 ‘무궁화가’로 표기되어 전승되었다. ▲ 영자신문 1897년 8월 17일자 가운데 ‘무궁화노래’ 기사 갈무리 이런 사실은 1897년 8월 17일자 영자신문 <independent>에 기록되었다. 기록자는 Jaishon, P, 곧 서재필이다. 이 기록은 그동안 영문판 독립신문 <editorial note>에 실렸는데 최근에야 필자가 발굴한 기사이다. 애국가 사료로서는 일대 획을 긋는 사료이다. 이 날의 기념식을 위의 기사를 통해 구체적으로 살피면 다음과 같다. 120년 전 기념행사는 낮 3시에 시작하여 5시에 마쳤는데, 배재학당 학생들의 ‘찬양’(Praise)으로 시작되었다. 독립협회 회장 안경수가 먼저 인사말을 했고, 외국인 참석자들을 소개했다. 이어 병중인 학부대신 이완용을 대신하여 한성판윤 이채연이 국가주의를 주창하는 연설을 했다. 그리고 배재 학당원들은 ‘무궁화노래’(National Flower)를 불렀다. 이어 당시 연희전문을 설립한 아펜젤러 목사가 등단, ‘조선거주 외국인들의 의무’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이어 서재필 박사가 ‘한국의 발전’을 주제로 강연했다. 그리고 마지막 강연자인 윤치호가 나와 강연을 했다. 윤치호의 강연 제목은 <우리가 기념하는 날>로 주제는 “청국의 역사는 잘 알면서 우리 역사는 모르는 것이 현실”이라는 요지로 청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했다. 그리고 서재필은 이 날 부른 노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기술했다. ▲ 영자신문 에 ‘무궁화 노래’ 기사를 올린 서재필의 만년 모습 “배재 청년들이 ‘무궁화노래’를 불렀다. 한국의 계관시인 윤치호가 이날 행사를 위해 작사한 것이다. 학생들은 이 시를 스크랜턴 여사가 오르간으로 반주하는 ‘올드 랭 사인’ 곡조에 맞춰 불렀다.” 다른 노래에 대해서는 ‘배재 학생들의 찬양’과 같이 의례적인 표현을 했는데, 두 번째 노래는 상세하게 기록한 것이다. 특히 윤치호를 ‘계관시인’(Poet Laureate)이라고 칭하여 작사자임을 명확히 했다. 이 기록은 거의 120년간 밝혀지지 않은 것으로, “현 애국가를 윤치호로 인정한다 해도 동일 후렴이 이미 1897년부터 불려 왔으니 그 후렴이 포함된 <무궁화노래>가 윤치호 작사라는 증거가 없는 한 애국가 작사자를 단정할 수 없다.”라는 주장이 1970년대부터 중요한 논거로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사실은 1897년 8월 17일자 영자신문 <independent> 서재필 기사가 2015년에 밝혀짐으로서 애국가 작사자를 명확하게 밝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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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0] ‘계관시인 윤치호’, 무궁화가 작사‘계관시인 윤치호’, 무궁화가 작사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0] 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7.07.25 11:07:17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보전하세” 이 <애국가>의 후렴은 1897년부터 불린 <무궁화가>에서 쓰인 것이다. 그래서 <무궁화가>를 작사한 이가 <애국가> 작사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이 논리에서 윤치호가 <무궁화가>를 작사했음이 확인 되어야 한다. 이는 최근 영문판<독립신문>의 발굴에서 확인 되었다. 1897년 8월 8일에는 독립협회 <통상회>가 열렸다. 여기에서 서재필과 윤치호는 회원들에게 독립협회 활성화를 위해 토론회의 조직체 결성을 제안했다. 그리고 그 규칙을 제정하기 위해 위원 3인을 선출했는데 윤치호 등이 선출되었고, 윤치호가 독립협회를 시민들의 참여를 확장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이는 각종 기념행사에서 강연과 통역은 물론, 기념가를 지어 사용하는 활동이 확인이 된다. 바로 1897년 8월 13일 오후 3시, 조선 개국 505회 경절회(慶節會) 행사 참여다. <독립관>에서 개최된 이 행사에 대해서 먼저 당시 독립신문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행사 4일 후 17일자의 보도이다. ▲ 독립신문 ‘무궁화 노래’가 불렸다는 기사 1897년 8월 17일자 일젼에 독립관에셔 긔원졀 츅샤 일에 죠흔 연셜이 만히 잇시되 다 긔록 할 슈 업셔 대강 긔록하노라. 한셩 판윤 리채연씨가 연셜 하되 무론 엇던 나라던지 신민이 신민의 직무를 아니 하거드면 졍부에셔 졍부 직무 하기가 어려온지라 그런고로 의졍 대신 이하로 각기 직무를 거드면 그 나라 일이 져졀노 잘 되 법이라.(줄임) 아편셜라씨의 영어 연셜은 후일에 번역 하야 낼터이요. 윤치호씨의 연셜은 긔원졀을 죠션 인민이 경츅하는 일이라. 나라마다 경츅이 잇는 긔원졀이 조선이 경츅졀이라.(줄임) 젼국 인민이 당쵸에 긔원졀이 무엇인지 모르니 엇지 한심치 아니 리요. 죠션 인민이 이럿케 된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른 나라 모양으로 자긔 나라 샤긔와 자긔 나라에 유명 인사들의 뎍들과 자긔 나라 디위를 공부 아니 하고 다 쳥국 것을 한즉, 자긔 나라 일은 도모지 모르고 죠션 인사들의 문벌이나 공부 하며 무단 협잡 하면 돈 벌 것이나 알고 자긔 나라에 영광 되고 쟈랑스런 것은 하나도 모로고 다 못된 학문들만 잇시니 국가에 셜령 아무 죠흔 일이 잇드라도 국민들이 그걸 엇지 경츅 하는 걸로 알 것이오. 윤씨의 말이 죠션 인민들이 죠션이 자긔의 나라인줄로 알게 하는 학문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더라.( 독립신문 1897년 8월 17일자 논설) ▲ 97년 순종의 기부금으로 거립된 독립관 기사에서 윤치호는 교사 아펜젤라와 의사 서재필에 이어 “긔원졀을 죠션 인민이 경츅하는 일이라”라고 시작하는 연설을 했다. 국민들이 조선이 개국한 날인 기원절을 모르는 것은 중국 역사를 공부하여 과거시험을 보는 모순임을 역설하고, 이제 우리 역사를 공부하는 시대를 맞자는 권고였다. 개화의식과 반청자주의식을 드러낸 것이다. 이 행사는 국가적 행사였다. 바로 노래가 의례적으로 불린 행사였다. 대죠션국 오백오회 긔원졀 츅사를 팔월 십삼일 오후 셰시에 독립관에셔 국긔를 놉히 달고 그 아래 화쵸로 단쟝 하엿서 졍부 대쇼 관인과 여러 학도와 인민이 만히 모혓시며 각국 공령사와 신사와 부인들이 각기 례복을 가쵸 입고 뎨뎨히 안졋는지라. 그 츅수가 일졀를 보니 쳐음에 학당 학원들이 츅슈가를 불너 오천 여년 우리 왕실 만셰 무궁 도으쇼셔 찬송 하니 외국부인이 악긔로 률에 쫒아 병챵 하더라. 둘 째 회쟝 안경슈씨가 연셜 하고 셋 째 한셩 판윤 리채연씨가 학부대신 리완용씨를 대신 하야 국민의 당연히 할 직무를 연셜 하고, 넷째 배재학당 학원들이 ‘무궁화 노래’를 불으니, 우리나라 우리님군 황텬이 도으샤 님군과 백셩이 한 가지로 만만셰를 길거야 태평 독립하여 보셰 하니 외국 부인이 악긔로 률에 병챵 하더라다. 다섯 째 미국 교사 아편셜라씨가 영어로 죠션에 거류 외국 인사들을 대하 야 각기 당연히 할 직무를 연셜 하며, 여셧 째 졔손씨가 죠션 관민들을 대하야 진보 할것을 연셜 하고, 일곱 째 배재학당 학원들이 ‘나라 사랑하는 노래’를 불으니 외국 부인이 악긔로 률에 쫒아 병챵 하더라. 여섯 째 젼 협판 윤치호씨가 긔원졀일 문졔를 연셜 한 후에 탁지 대신 심샹훈씨가 졔손씨와 외국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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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9] 윤치호 ‘애국가는 내가 작사하였다’고 진술윤치호 ‘애국가는 내가 작사하였다’고 진술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9] 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7.07.17 11:28:31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음악평론가 박은용(朴殷用/1919~1985)은 1948년 10월 7일자 동아일보 <애국가 고(愛國歌 攷)>(2)에서 도산 안창호가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것은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한탄하며,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주장하였다. 이 시기 발행된 이광수의 《도산 안창호전》에 ‘애국가’ 작사자를 안창호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 반론으로 쓴 것이다. “뚜렷한 역사의 사실을 조작할 수는 없다.”라고 전제하고, “윤치호의 처지가 소위 대동아전쟁을 통해 그에겐 불리한 관사가 붙게 된 것도 주지의 사실이지만 그의 작이 아닌 것을 자작으로 위서할 필요는 만무한”것이라고 하였다. 이 주장의 근거는 바로 윤치호가 1945년 9월 자필로 애국가 4절을 남긴 <가사지>이다. “고 윤치호씨가 현재 아무리 불미한 입장에 있다더라도 그것 때문에 애국가를 작사한 사실까지를 무시하고 거짓으로 도산 선생 작품을 만들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밝힐 건 바로 밝히고 시정할 것은 바로 시정해야 한다. 위정당국은 이 사실을 규명하여 공포함으로써 국민 교육의 상식에 벗어나지 않게 하여야 될 것”(동아일보, 1948. 10. 7) 이후 이 <가사지>를 주목한 이는 신학자 백낙준(白樂濬/1896~1985)이다. 그는 소론 <윤치호의 애국가 작사고>(윤치호선집 2, 1999)>에서, 윤치호가 작사했다는 외증(外證)으로 “좌옹 자신이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애국가를 자기의 작이라고 서면으로 증언한 바가 있다.”고 했다. 이 같은 주장은 기독교 서지학자 윤병춘(尹春炳/1918~2010) 목사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가 임종하시기 전에 자녀들의 권유로 쓴 친필 애국가는 일제치하에서 애국가 작사자가 자신임을 알리지 못했던 것을 조국 해방 후에 밝히려 했던 것이며, 자신이 이루지 못했던 큰 뜻을 자손 대에서 이어주기를 바라는 유언장이기도 했다.(윤병춘, <윤치호선집 2>, 1999) 또한 최근에는 아동문학가 이오덕 선생도 이 <가사지>를 증거로 다음과 같이 윤치호를 작사자로 인정했다. “애국가 노랫말을 지은 사람이 윤치호란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 신문은 윤치호 자신이 지은 애국가를 손수 붓으로 써서 '윤치호 작사'라 해 놓은 것을 사진으로 공개한 것이다. 이래서 지금까지 누가 지었는지 확실히 몰랐던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란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그리고 1955년 윤치호 가족으로부터 <가사지>를 사본화 하고,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제(解題)를 달아 놓았다. “愛國歌 / 분류 書畵 > 筆蹟 / 등록번호 史資 2220 / 본문 愛國歌 / 대한제국 때의 정치가 佐翁 尹致昊(1865∼1945)가 애국가 가사를 자필로 쓴 원고. 사진 자료의 끝 부분에 一九0七年 尹致昊 作이라고 쓰여 있음. / 1(2), 한글 / 소장; 서울특별시 尹永善(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종합데이터베이스 검색, ‘애국가’) 현 애국가 가사를 첫 기록인 1908년 재판 「찬미가」 제14장, 자필 <가사지>, 그리고 현재 것을 대비하면 다음과 같다. 1908년 재판 「찬미가」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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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8] 김구, 왜 애국가 작사자 이름을 잊었다고 했나?김구, 왜 애국가 작사자 이름을 잊었다고 했나?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김연갑 애국가학교 교장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7.07.07 11:34:30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애국가학교 교장] 임시정부는 애국가 작사자를 누구로 알고 있었을까? 이는 김구 주석의 인식에서 살필 수 있을 것이다. 김구 주석은 1945년 애국가 악보에서 그 해석을 가능케 하는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바로 《한중영문중국판(韓中英文中國版) 한국애국가(韓國愛國歌)》란 악보집 기록이다. 이 악보에는 중국 충칭(중경)에서 발행된 김구의 장서인과 친필로 표제를 쓴 표지 왼쪽에 ‘金九 題(김구 제)’와 ‘金九之印(김구지인)’이라는 인장과 김구 친필로 ‘一九四五 十月十八日’(1945년 10월18일)이 쓰여 있다. 뒷면 중앙에는 중사장(中山裝)의 김구 사진이 있고, 사진 아래쪽에서는 <한국애국가 고사(故事)>와 작곡자 그리고 번역자(중역/민석린, 영역/정한범)를 소개했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김구를 비롯한 임정 요인들은 이 악보집 출간에 의한 실물 악보를 보지 못하고 귀국했을 것이다. 이 악보집은 충칭의 <음악월간사(音樂月刊社)>라는 출판사에서 이사소(李士釗)가 편집, 발행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국 국가의 역사성을 비롯해 변천 과정과 법적 지위 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부여한다. 일본의 항복으로 광복을 중국 중경에서 맞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요인들의 귀국을 앞두고 《한중영문중국판(韓中英文中國版) 한국애국가(韓國愛國歌)》 악보를 발행했다. 이 악보의 존재는 1942년 미국 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가 애국가의 올랭사인(Auld lang syne) 곡조를 이어서 신곡으로 변경 요청한 것을 허가해준 후, 이어서 중경임시정부도 자체적으로 안익태 곡으로 바꾸고 이 신곡을 ‘애가(國歌)’로 불러왔다는 것을 확인해 준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중국국민당은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정책을 진행시키는 가운데, 중한문화협회(中韓文化協會)가 출범하기에 이르렀다. 이 단체는 중국정부가 임시정부와의 문화적 유대를 토대로 교류를 통한 한중우호를 증진시키려는 공공외교의 채널이었다. 이 무렵 중한문화협회가 인쇄비를 음악월간사 이사소에게 지원하는 형태로 중경임시정부는 《한국애국가》악보를 발행하게 된다. 김구 주석의 측근 엄항섭(嚴恒燮)와 민필호(閔弼鎬) 등이 준비한 자료를 토대로 발행된 이 악보는 임시정부의 위상을 홍보하는 목적과 함께, 광복 한국의 영도자로서 김구를 부각시키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애국가》는 대한민국이 법통을 이어 받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경에서 발행한 마지막 출판물이며, 동시에 임시정부 주석의 명의로 출판된 첫 “국가(國歌)의 악보(樂譜)”이다. 안익태 곡 애국가는 1948년 정부 수립 시에 “대한민국 국가(國歌)”로서가 아니라 194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채택한 국가(國歌)”로 먼저 확정되었다. 그런데 김구는 애국가 작사자에 대해 <한국애국가 고사(故事)>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 애국가는 ①50년 전에 한 ②한국애국지사의 수필(手筆)로 창작되었는데, 이미 ③일명(佚名, 이름을 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