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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4] 3•1만세운동과 애국가

기사입력 2015.03.01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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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만세운동과 애국가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4

    [한국문화신문 = 김연갑 국가상장연구회 위원]  만세운동이란 나라를 오래도록 유지시켜 달라는 기원을 구호로 하여 저항의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31운동에서의 만세는 조국이여 만년동안 계속 될 지어다라는 뜻이다이때의 운동이 위와 같이 저항의 한 수단인만세운동이었음은 민중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조선인이 모두 현실의 학정에 비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우리는 구한국 정부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독립 만세를 부르는 것이니 우리 다 같이 끝까지 독립만세 시위를 그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여 그 목적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그래서 경성 시내가 만세 소리에 떴다 잠겼다고 할 정도였다. 

    실제 시위에 대한 스스로의 명칭에서도 만세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그것은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시위를 용천리 시위에서 희생자가 많이 난 것에 대해 현북면민이 위로하기 위하여 용천리로 가서 만세운동을 벌였는데 이를 위로 만세라 했던 것이다또한 이때 만세 운동을 위해 집결한 하조대 뒷편의 고개를 만세고개라고 부르는 데서 알 수 있다. 

    또한 굳이 군수나 면장이나 구장(리장)등의 관공리를 앞장 세워 만세를 부르게 한 것도 이와 같은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이다예를 들면 개성에서 일인 군수에게 만세를 부르게 한 것과 경남 진주 시위에서 군수 민인호를 사로잡아 제복과 제모를 벗긴 후 같이 독립만세를 부르게 한” 경우나 함안 가야면 시위 때 관헌들에게 만세를 부르게 한 경우 등이다이같이 만세를 부르게 한 것은 관리들로부터 항복을 받는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 수원 김향화와 33인의 기생들은 3•1만세시위에 앞장썼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만세운동에서의 무기는 없었다다만 시위 도구는 있었다그것이 바로 깃발과 구호와 노래였던 것이다깃발은 태극기였고구호는 조선(대한)독립만세가 주였고노래는 애국가가 주였다물론 태극 깃발 외에도 농민들이 사용한 농기도 사용되었듯이 노래도 애국가뿐만 아니라 교가찬송가, ’아리랑‘ 그리고애국가류와 독립가>류도 불렸다이중에 애국가와 독립(운동)가가 가장 많이 불린 노래이다. 

    이때에 일본 헌병이 쫓아와서 제일 선두에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만세를 외치던 최석일의 태극기를 든 바른팔을 무도하게 일본도로 내리쳤다최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자기 팔과 함께 떨어진 깃발을 얼른 왼손으로 주워들며 그냥 만세를 불렀다헌병은 다시 그 왼팔마저 칼로 내리쳤다최는 양팔을 다 잃었지마는 안색이 오히려 태연하여 입만으로도 만세를 계속하였다악귀와도 같은 일본 헌병은 이번에는 이미 피투성이가 된 최의 목을 쳐서 그는 장렬하게 순사했다이같이 최가 쓰러져 죽자 그 바로 뒤에서 행진하던 김사걸이 최가 떨어뜨린 태극기를 주워들고 계속 앞장서서 나갔다이번에는 헌병 보조원이 짐승을 죽이는데 사용하던 쇠 갈구리를 들고 달려들어 그의 배를 쳐서 질질 끌고 가던 도중 일본인 헌병이 총탄을 발사해 죽고 말았다.“  

    이상과 같은 상황은 경남 창원군 진북면 사동리 시위에서 김수동(金守東)의 경우이기도 한데이처럼 태극기는 시위에서의 중요한 도구였음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다. 31운동 중 일제의 제암리 학살에 이어 두 번째로 악명 높은 정주 학살 사건 그리고 진북 학살사건에서 태극기의 위상을 확연히 볼 수 있었다. 

    “3월 1일 오후 1시였다남녀교인들과 시내 지식계급에 속하는 유지들이 식장인숭덕학교교정으로 모여들어 장내는 1천 수백 명에 달했다선교사 모페트(馬 布三悅)도 내빈석에 와 앉았고 일본인 경찰인 사복형사들이 경비진을 지키고 있었다봉도식(奉悼式)은 찬송가와 기도로 간단히 조의를 표하고 끝나자 돌연히 대형 태극기가 단상에 게양되어 군중들은 꼭 10년 만에 다시 대하는 국기인지라 한편 놀라고 한편 기뻐 주목할 즈음도인권(都寅權)이 단상에 뛰어올라 이제부터 조선독립선포식을 거행하겠다고 그 취지를 설명했다이어서 목사 정일선(丁一善)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목사 강규찬이 연설했다식은 목사 김선두가 사회하였고애국가 봉창은 삽시간에 감격과 흥분의 도가니로 화하였는데 승덕학교 교사 황찬영과 윤원삼은 미리 준비했던 태극기를 날라다가 군중에게 나누어 주자 만세소리가 우뢰와 같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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