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V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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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회 공주아리랑제 무관중 비대면 공연(주관:(사)공주아리랑보존회/남은혜)제22회 공주아리랑제 (사)공주아리랑보존회 공주문예회관 2020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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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성주아리랑제-정은하 외4명/ 단천아리랑, 독립군아리랑 -정은하 외4명 단천아리랑 독립군아리랑 - 성주아리랑보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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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사] 김연갑아리랑학교장, 코로나아리랑 발표회코로나아리랑 발표회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가 오는 14일 경북 문경시 중앙공원 야외공연장에서 '코로나 방역 아리랑' 제작 발표회를 연다.9일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에 따르면 '코로나 방역 아리랑'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맞아 이를 극복하기 위한 기본수칙과 의지를 담고 있다.주최측은 치료약도, 예방약도 없는 코로나19 위기 속에서 오로지 거리 두기, 손 씻기 등 기본 수칙을 지켜야만 하는 안타까움 속에 모두가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여름이 되면 바이러스가 약화돼 호전될 줄 알았지만 감염병 전문가들은 장기화와 가을께 2차 팬데믹을 경고하고 있음도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그러면서 코로나19 극복 의지 등을 담은 '코로나 방역 아리랑'을 모두가 함께 부르며 이 난국을 슬기롭게 헤쳐 나가기 위해 발표회를 준비했다고 이번 발표회 배경을 소개했다.이만유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장은 "10여명의 시민위원회 합창단 단원들이 밤낮으로 발표회를 준비하고 있다"며 "전 국민이 부르는 아리랑이 되어 지구상에서 코로나19가 사라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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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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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민요 - 국가무형문화재 제95호제주의 민요.바람 같고. 눈물 같구, 바다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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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동현] 영남아리랑연곡문경아리랑-영천아리랑-밀양아리랑 연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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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2020 제6회경산아리랑제[동영상] 2020 제6회경산아리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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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문경아리랑축제 진객 아리랑인스티튜드 서울지부장 마이클 람브라우 박사 인터뷰북한대학원대학교 후배이자 아리랑인스티튜드 서울지부장 마이클 람부라우박사가 문경새재아리랑축제 취재를 위해 서울에서 새벽에 출발하여 문경에 도착했다. Q.안녕하세요.미국에서 오자마자 바로 문경새재아리랑축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문경에는 몇번째 오시나요? A.이번에 오면 3번째 오는 것 같아요. 제가 제일 처음으로 아리랑을 공부하려고 답사한 곳이 문경새재아리랑 지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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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아리랑본부 #공노원 회장 #자기소개나는 1939년 한반도에서 강제동원 되어 사할린으로 강제이주하신 부모님이 사할린 코르샤코프 항구에서 태어난 공노원입니다. 아버지는 우리가족은 조선에서 왔고, 중국의 현자 공자님의 후손이고 20대손이라고 하셨고, 그래서 저의 이름은 노나라 노자, 원나라 원자에서 따온 노원이라 지어 주셨습니다. 이 세상을 크게 보라는 세계관을 심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세계사는 저의 큰 관심사이었습니다. 러시아에서 태어나서 러시아말을 하고 살지만 우리 가족은 언제나 조선어로 말을 하고 조선 김치를 먹고 살았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해방이 되었지만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억류된 우리 가족은 할 수 없이 러시아 국민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늘 너희만이라도 반드시 조선땅에 가서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다행히 오늘한국으로 영구귀국해서 인천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공재철 1914-1970년)는 언제나 조선말만 하시고 러시아말은 배우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탄광에서 일을 하셔서 그래도 대충 알아듣고 소통은 하셨습니다. 국적을 바꾸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절대 러시아나 북한 국적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도 일본어 이름도 러시아 시대에도 러시아 이름도 우리에게는 있을 수 없다고 부정하셨습니다, 러시아 이름으로 개명한 사람들을 이상하게 보실 정도이셨습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20년이 흘러서 우리 형제는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할 수 없이 조선학교를 졸업하고 러시아 국적을 받았습니다. 1964년 사할린사범대학 생물과를 조업하고 지금까지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편을 잡고 있습니다. 한국어 교육에 대한 출발은 1988년 한국올림픽 성공이후 아버지와 부모님의 고향인 논산과 공주를 방문하고 눈부신 발전을 한 대한민국을 보고 교직생활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한러수교가 시작된 1990년 1990년 꿈에도 그리던 한국에 교육자로 초청을 받고 처음 한국땅을 밟자 제일 처음 떠오르는 사람은 수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목소리었습니다. 1970년 탄광에서 일하시다가 갑작스런 죽음으로 56세에 이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의 유훈이 강하게 떠올랐습니다. "조선어를 잊지말아라. 너는 언제가 우리말을 사용하고 가르쳐라.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잊지말아라 ” 그러나 이미 사할린에서 조선말이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그래서 결심을 하고 다시 한국어 공부를 해서 다음 세대에게 한국을 알리는 유일한 길은 한국어를 공용하게 하는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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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카레이스키아리랑 영화 제작/하바롭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