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아리랑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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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7] 도산 안창호의 <애국가>, 따로 있었다도산 안창호의 <애국가>, 따로 있었다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7] 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7.06.28 11:09:05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1955년부터 1956년 8월까지의 국사편찬위원회 소관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가 첫 해 3차에 걸친 조사결과로 윤치호가 유력하나 확정을 하지 못했다. 위원회에서 표결결과 11:2로 만장일치가 되지못해 윤치호로 확정을 하지 못했다. 이는 일면 신중을 기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역사적 사실문제를 학술적 결론이 아닌 거수로 결정하려했다는 것은 첫 단추부터 잘 못 꿴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듬해 8월 국사편찬위원회는 결론을 내렸다. 그 결과는 ‘윤치호가 작사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동안 안창호가 작사했다는 오해가 있게 된 것인가? 그것은 안창호가 1907년 귀국하여 국가(國歌), 국기(國旗), 국화(國花) 같은 국가상징의 필요성을 강연을 통해 표하고 나름의 ‘애국가’를 작사한 것에 따른 것이다. 다음은 귀국한 다음 달 의무균명학교에서 ‘애국가’의 기능을 설하고 지어 제창할 것을 강조한 기록이다. “西署萬里峴義務均明學校에서 去番 歸國하였던 美國 留學生 안창호씨가 生徒에게 對하여 勸勉한 內開에 美國 各種 學校에서는 愛國思想으로 每日 上학 前에 國旗에 禮拜하고 愛國歌를 唱함을 見한 즉 其開明模範을 令人感昻이라. 然則 凡吾學校도 從今 施行하자 하므로 該校에서 去月曜日로 爲始하여 拜旗唱歌例를 舉行한다더라.”<國旗禮拜,『大韓每日申報』1907년 3월 20일자> 이는 안창호가 미국의 경험을 제시하며 한국에서도 이를 따를 필요가 있음을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직접 ‘애국가’를 작사했다. 이 존재는 1908년 3월 『태극학보(太極學報)』 제18호에 발표한 <애국가(愛國歌)>로 확인 된다. 필명을 ‘애국생(愛國生)’으로 하여 망국의 책임이 누구 탓도 아닌 너와 나의 탓이므로, 주인으로서 애국정신과 하나 된 단체 힘으로 나라를 되찾아 중흥영웅이 되자고 하는 내용이다. <애국가> 1. 슬프도다 우리민족아 / 사천여 역사국으로 자자손손 복락하더니 / 오늘날 이지경 웬일인가 2. 일간두옥도 내 것 아니요 / 수묘전토도 내 것 못되네 무리한 수욕을 대답 못하고 / 공연한 구타도 거져 밧노라 3. 남산초목도 눈이 있으면 / 비창한 눈물이 가득하겠고 동해에 별도 마음이 있으면 / 우리와 같이 슬퍼하리라 4. 한치 벌레도 만일 밟으면 / 죽기전 한번 움직거리고 조그만 벌도 남이 다치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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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나운규 선생을 찾아가는 길-영화 아리랑 개봉 90주년 (201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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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단성사 내부에 '단성사 기념관' 설치해야 한다"…왜?인쇄하기 닫기 연예 > 영화 "단성사 내부에 '단성사 기념관' 설치해야 한다"…왜? 등록 2015-04-27 09:13:07 | 수정 2016-12-28 14:55:09 【서울=뉴시스】박동욱 기자 = 1907년 세국내 최초로 문을 연 상설영화관인 단성사가 건물을 담보로 잡고 있던 은행의 대출금 회수 절차로 해체될 위기에 놓였다. 사진은 5일 오후 문 닫힌 서울 종로구 단성사의 모습. 2015.02.05. fufus@newsis.com 【서울=뉴시스】한겨레아리랑연합회(상임이사 김연갑)가 25일 “단성사를 우리나라 극장의 역사로 존치시켜야 한다”고 촉구했다. 근거는 크게 아홉 가지다. 단성사는 1907년 6월4일 ‘역사와 개량 발전의 시대적 사명을 연설(演說)한 사회를 조성하기 위하여 단성사(團成社)라 명칭’한 연예관으로 탄생, 1918년 12월21일 최초의 영화 상설관이 된 극장이다. 우리 근대 문화사를 함께한 민족극장이다. 단성사는 1919년 10월27일 최초의 우리영화인 김도산 감독의 연쇄극 ‘의리적 구토(義理的仇討)’를 개봉하여 ‘영화의 날’(1963년 제정)을 탄생시킨 역사적인 극장이다. 단성사는 나운규 감독의 영화 ‘아리랑’을 1926년 10월1일 개봉하여 ‘민족영화 아리랑’을 탄생시켰다. 민간전승 민요 아리랑을 문화영역 대중예술 아리랑으로 확산시켜 다양성과 초역사성을 갖게 한 기념비적 유적지이다. 단성사는 소속 감독이며 변사인 김영환을 통해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를 편곡하게 하여 전 민족 구성원에 확산시켜 ‘민족의 노래 아리랑’으로 위치시켰다. 이를 기념한 ‘아리랑의 날’(2013년 제정)을 탄생시킨 아리랑 역사의 거점이다. 단성사는 1926년 10월1일 오후 4시, 나운규 감독의 영화 ‘아리랑’ 개봉으로부터 1947년 11월12일 ‘다시보자 아리랑’ 상영까지 재개봉, 재상영, 동시상영, 특별상영 등으로 20여년 간 31회나 상영하여 아리랑 위상에 기여했다. 단성사는 나운규 감독·주연 영화 ‘아리랑’ 제1편(1926), 2편 ‘아리랑, 그 후 이야기’(1929), 제3편 ‘말 문 연 아리랑’(1936)은 물론, 홍개명 감독 영화 ‘아리랑 고개’(1936), 이강천 감독의 ‘아리랑’(1954), 김소동 감독의 ‘아리랑’(1957), 최무룡 감독의 ‘아리랑, 나운규의 일생’(1966), 유현목 감독의 ‘아리랑’(1968)까지 개봉한 ‘아리랑 극장’이다. 【서울=뉴시스】영화 ‘아리랑’ 단성사는 무용 ‘아리랑’(1929·배구자 작), 레뷰 ‘춘하추동 아리랑’(1930·연극사 제작), 민요극‘아리랑’(1933·나운규 작), 연극 ‘아리랑 반대편’(1931·신불출 연출), 가극 ‘아리랑’(1943·이부풍 작), ‘신 아리랑’(1943·김춘광 작), 연극 ‘아리랑’(1945·예원좌), 종합쇼 ‘아리랑 환상곡’(1945·한영철 연출), 그리고 김석민 작·연출 ‘양자강의 아리랑’ 등 다양한 장르의 아리랑 명칭 작품 80여 편을 공연하여 아리랑을 대중문화로 인식시킨 극장이다. 단성사는 1927년 전문 영화음악 연주단 ‘단성관현악단’을 운영하고 1931년 영화 전문지 ‘영화가’를 발간하고, 1937년 8월11일 영화감독 나운규의 영결식을 거행하는 등 기업문화를 실현한 업체이다. 단성사는 1993년 영화 ‘서편제’ 개봉 최장 상영기록 194일을 기록하며 진도아리랑의 흥과 멋을 알려 국악진흥에 기여한 ‘문화 공간’이다. 1907년 ‘연예관 단성사’에서, 1953년 ‘㈜단성사’로 , 2005년 ‘멀티플렉스 단성사’로, 2008년 4월 ‘씨너스 단성사’로, 다시 2008년 11월 ‘아산 단성사’로 역사를 이어왔다. 그리고 2010년 7월 휴면에 들었다. 서울 종로구 돈화문로 26번지(묘동 56) 지하 4층∼지상 10층(1만3642㎡) 단성사 건물은 ‘경성부 수은동 단성사’ 107년의 역사를 지녔다는 표지석도 없이 5년간 방치되었다. 2015년 3월12일, 5년을 건너 버스 판매 주력업체인 영안모자 계열사 자일오토마트가 새 주인이 되어 ‘영안 단성사’로의 출발을 기대하게 되었다. 사단법인 한겨레아리랑연합회는 1996년 영화 ‘아리랑’ 개봉 60주년을 맞아 당시 단성사에게 ‘역사 코너’를 건의했고, 1996년 ‘아리랑’ 필름 되찾기운동을 공동으로 시행했고, 2006년 ‘단성사 100년사’ 공동 출판을 논의한 바 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서울=뉴시스】영화 ‘아리랑’의 복원된 전단. 신나라레코드가 1만매를 제작했다. 한겨레아리랑연합회는 영안 자일오토마트사와 문체부, 문화재청, 서울시에 다음 사항을 청원한다. 하나, 단성사 건물 주변에 역사성과 의의를 새긴 기념 표지를 설치해야 한다. 더불어 2005년 설치한 기념 조형물을 처음 설치한 위치에 존치시켜야 한다. 둘, 규모를 떠나 ‘단성사’ 명칭의 영화 상영관이 유지되어 근대문화사의 명소로 우리 곁에 있게 해야 한다. 셋, 극장 단성사와 영화 ‘아리랑’과 영화인 나운규를 기념하는 가칭 ‘단성사 기념관’을 건물 내에 설치하여 근대 대중문화사의 메카로 삼아야 한다. 넷, ‘단성사 기념관’이 민족영화 ‘아리랑’ 필름 찾기운동 등의 역사적 영화 필름 찾기 활동 거점으로 활동하게 해야 한다. 다섯, 세계의 노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란 아리랑의 위상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기억의 장소’로 존치시켜야 한다. 한겨레아리랑연합회 기미양 사무국장은 “영안모자 자일오토마트 측이 단성사 건물에 단성사 기념관을 설치한다면 전시자료 제공과 운영을 무상으로 전담할 수 있다”고 밝혔다.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쇄하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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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성사 내부에 '단성사 기념관' 설치해야 한다"…왜?인쇄하기 닫기 연예 > 영화 "단성사 내부에 '단성사 기념관' 설치해야 한다"…왜? 등록 2015-04-27 09:13:07 | 수정 2016-12-28 14:55:09 【서울=뉴시스】박동욱 기자 = 1907년 세국내 최초로 문을 연 상설영화관인 단성사가 건물을 담보로 잡고 있던 은행의 대출금 회수 절차로 해체될 위기에 놓였다. 사진은 5일 오후 문 닫힌 서울 종로구 단성사의 모습. 2015.02.05. fufus@newsis.com 【서울=뉴시스】한겨레아리랑연합회(상임이사 김연갑)가 25일 "단성사를 우리나라 극장의 역사로 존치시켜야 한다”고 촉구했다. 근거는 크게 아홉 가지다. 단성사는 1907년 6월4일 ‘역사와 개량 발전의 시대적 사명을 연설(演說)한 사회를 조성하기 위하여 단성사(團成社)라 명칭’한 연예관으로 탄생, 1918년 12월21일 최초의 영화 상설관이 된 극장이다. 우리 근대 문화사를 함께한 민족극장이다. 단성사는 1919년 10월27일 최초의 우리영화인 김도산 감독의 연쇄극 ‘의리적 구토(義理的仇討)’를 개봉하여 ‘영화의 날’(1963년 제정)을 탄생시킨 역사적인 극장이다. 단성사는 나운규 감독의 영화 ‘아리랑’을 1926년 10월1일 개봉하여 ‘민족영화 아리랑’을 탄생시켰다. 민간전승 민요 아리랑을 문화영역 대중예술 아리랑으로 확산시켜 다양성과 초역사성을 갖게 한 기념비적 유적지이다. 단성사는 소속 감독이며 변사인 김영환을 통해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를 편곡하게 하여 전 민족 구성원에 확산시켜 ‘민족의 노래 아리랑’으로 위치시켰다. 이를 기념한 ‘아리랑의 날’(2013년 제정)을 탄생시킨 아리랑 역사의 거점이다. 단성사는 1926년 10월1일 오후 4시, 나운규 감독의 영화 ‘아리랑’ 개봉으로부터 1947년 11월12일 ‘다시보자 아리랑’ 상영까지 재개봉, 재상영, 동시상영, 특별상영 등으로 20여년 간 31회나 상영하여 아리랑 위상에 기여했다. 단성사는 나운규 감독·주연 영화 ‘아리랑’ 제1편(1926), 2편 ‘아리랑, 그 후 이야기’(1929), 제3편 ‘말 문 연 아리랑’(1936)은 물론, 홍개명 감독 영화 ‘아리랑 고개’(1936), 이강천 감독의 ‘아리랑’(1954), 김소동 감독의 ‘아리랑’(1957), 최무룡 감독의 ‘아리랑, 나운규의 일생’(1966), 유현목 감독의 ‘아리랑’(1968)까지 개봉한 ‘아리랑 극장’이다. 【서울=뉴시스】영화 ‘아리랑’ 단성사는 무용 ‘아리랑’(1929·배구자 작), 레뷰 ‘춘하추동 아리랑’(1930·연극사 제작), 민요극‘아리랑’(1933·나운규 작), 연극 ‘아리랑 반대편’(1931·신불출 연출), 가극 ‘아리랑’(1943·이부풍 작), ‘신 아리랑’(1943·김춘광 작), 연극 ‘아리랑’(1945·예원좌), 종합쇼 ‘아리랑 환상곡’(1945·한영철 연출), 그리고 김석민 작·연출 ‘양자강의 아리랑’ 등 다양한 장르의 아리랑 명칭 작품 80여 편을 공연하여 아리랑을 대중문화로 인식시킨 극장이다. 단성사는 1927년 전문 영화음악 연주단 ‘단성관현악단’을 운영하고 1931년 영화 전문지 ‘영화가’를 발간하고, 1937년 8월11일 영화감독 나운규의 영결식을 거행하는 등 기업문화를 실현한 업체이다. 단성사는 1993년 영화 ‘서편제’ 개봉 최장 상영기록 194일을 기록하며 진도아리랑의 흥과 멋을 알려 국악진흥에 기여한 ‘문화 공간’이다. 1907년 ‘연예관 단성사’에서, 1953년 ‘㈜단성사’로 , 2005년 ‘멀티플렉스 단성사’로, 2008년 4월 ‘씨너스 단성사’로, 다시 2008년 11월 ‘아산 단성사’로 역사를 이어왔다. 그리고 2010년 7월 휴면에 들었다. 서울 종로구 돈화문로 26번지(묘동 56) 지하 4층∼지상 10층(1만3642㎡) 단성사 건물은 ‘경성부 수은동 단성사’ 107년의 역사를 지녔다는 표지석도 없이 5년간 방치되었다. 2015년 3월12일, 5년을 건너 버스 판매 주력업체인 영안모자 계열사 자일오토마트가 새 주인이 되어 ‘영안 단성사’로의 출발을 기대하게 되었다. 사단법인 한겨레아리랑연합회는 1996년 영화 ‘아리랑’ 개봉 60주년을 맞아 당시 단성사에게 ‘역사 코너’를 건의했고, 1996년 ‘아리랑’ 필름 되찾기운동을 공동으로 시행했고, 2006년 ‘단성사 100년사’ 공동 출판을 논의한 바 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서울=뉴시스】영화 ‘아리랑’의 복원된 전단. 신나라레코드가 1만매를 제작했다. 한겨레아리랑연합회는 영안 자일오토마트사와 문체부, 문화재청, 서울시에 다음 사항을 청원한다. 하나, 단성사 건물 주변에 역사성과 의의를 새긴 기념 표지를 설치해야 한다. 더불어 2005년 설치한 기념 조형물을 처음 설치한 위치에 존치시켜야 한다. 둘, 규모를 떠나 ‘단성사’ 명칭의 영화 상영관이 유지되어 근대문화사의 명소로 우리 곁에 있게 해야 한다. 셋, 극장 단성사와 영화 ‘아리랑’과 영화인 나운규를 기념하는 가칭 ‘단성사 기념관’을 건물 내에 설치하여 근대 대중문화사의 메카로 삼아야 한다. 넷, ‘단성사 기념관’이 민족영화 ‘아리랑’ 필름 찾기운동 등의 역사적 영화 필름 찾기 활동 거점으로 활동하게 해야 한다. 다섯, 세계의 노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란 아리랑의 위상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기억의 장소’로 존치시켜야 한다. 한겨레아리랑연합회 기미양 사무국장은 "영안모자 자일오토마트 측이 단성사 건물에 단성사 기념관을 설치한다면 전시자료 제공과 운영을 무상으로 전담할 수 있다”고 밝혔다.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쇄하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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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 작사자 윤치호냐, 안창호냐 치열한 격론 벌여애국가 작사자 윤치호냐, 안창호냐 치열한 격론 벌여 [흥사단 애국가 작사자 연구논문발표회] 정석현 기자 asadal1212@hanmail.net 등록 2015.04.01 12:55:50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한국문화신문 = 정석현 기자] 나라를 사랑하는 정신을 일깨워주기 위한 노래 애국가, 그 애국가는 우리의 국가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애국가의 작사자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그동안 많은 이들이 이를 연구해왔지만 아직도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이다. 그 가운데 윤치호설, 안창호설, 민중설은 작사자에 대한 대표적인 주장들이다. 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오고 있는 연구자들이 흥사단(애국가작사자규명위원회, 위원장 오동춘) 주최로 어제(3월 31일) 늦은 2시 국회도서관 지하 회의실에서 "흥사단 애국가작사자 연구논문발표회”를 열었다. ▲ 축사를 하는 황인자 국회의원 발표회에 앞서 축사를 한 황인자(새누리당) 의원은 "현재 애국가의 작사자가 누구인지 명확히 규명되지 않은 상태이다. 하지만, 누가 작사했던 애국가는 우리 모든 겨레의 국가이다.”라고 강조했다. 첫 번째 발표는 "윤치호 애국가 작사 연구”라는 제목으로 김연갑 (사)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가 맡았다. 그는 "1908년에 나온 찬미가 제14장, 국기 전에 썼다는 애국가 필사본, 조선총독부 자료, 일제강점기 당시 미국동포 신문, 해방직후 공보처가 발행한 자료집 등 많은 자료에 윤치호 작사로 표기가 되었고, 그밖에 많은 증언 등으로 이미 윤치호 작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아직 작사자 논쟁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서 "애국가와 안창호작사설 ǁ”라는 제목으로 명지대학교 국제학연구소 안용환 연구교수가 발표했다. 그는 "1907년에 작사한 애국가라면 ‘충성을 다하여’가 아니라 ‘님군을 섬기며’로 되어 있었고, 이를 1919년 이후에야 상해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충성을 다하여’로 고쳐 불렀다. 그런데도 윤치호가 작사했다는 1907년 애국가에 이미 ‘충성을 다하여’라고 되었다면 이 애국가는 믿기 어려운 자료라고 봐야만 한다.”라고 말하며 애국가의 작사자는 안창호가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 주제발표자들 / 김연갑, 안용환, 김준혁, 윤정경(왼쪽부터) 세 번째로 나온 "애국가 작사자 규명의 의미와 불편한 논의”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김준혁 한신대핚교 정조 교양대학 교수는 "1955년 친일파 최남선을 위원장으로 하는 애국가 작사자를 찾는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애국가를 윤치호가 작사한 것으로 확정했는데 그의 친일 행각을 덮어주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충분히 가질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 에모리대학 소장 일기와 국사편찬위원회 복사 자료에도 윤치호의 애국가 작사 일기가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도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작사자는 독립협회 또는 민중의 합작품일 가능성도 있다.”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마이크를 잡은 윤정경 애국가연구가는 안창호와 가까웠던 자신의 막내 할아버지는 분명히 안창호가 애국가를 작사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면서 그밖에도 많은 증언자들의 애기를 들었다. ▲ 흥사단 애국가 작사자 연구논문발표회 모습 이날 발표회가 있은 국회도서관 지하 회의실은 참석자들로 자리를 가득 메워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관심이 상당함을 증명했다. 천호동에서 발표를 들으러 왔다는 강성희(67) 씨는 "양측의 주장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하다. 그런데 양측의 주장이 한편으로 일리가 있지만 아직 더 규명해야할 부분이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또 만일 윤치호설이 맞는다면 우리는 친일파가가 만든 애국가를 그동안 불러왔다는 것이 되어 불편한 마음이 될 수밖에 없고, 새로운 애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될 것이 뻔해 걱정스럽다.”는 의견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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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4] 3•1만세운동과 애국가3•1만세운동과 애국가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4 김연갑 국가상장연구회 위원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5.03.01 10:08:22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한국문화신문 = 김연갑 국가상장연구회 위원] ‘만세운동’이란 나라를 오래도록 유지시켜 달라는 기원을 구호로 하여 저항의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3•1운동에서의 “만세”는 “조국이여 만년동안 계속 될 지어다”라는 뜻이다. 이때의 운동이 위와 같이 저항의 한 수단인〈만세운동〉이었음은 민중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조선인이 모두 현실의 학정에 비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구한국 정부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독립 만세를 부르는 것이니 우리 다 같이 끝까지 독립만세 시위를 그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여 그 목적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경성 시내가 만세 소리에 “떴다 잠겼다”고 할 정도였다. 실제 시위에 대한 스스로의 명칭에서도 ‘만세’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것은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시위를 용천리 시위에서 희생자가 많이 난 것에 대해 현북면민이 위로하기 위하여 용천리로 가서 만세운동을 벌였는데 이를 “위로 만세”라 했던 것이다. 또한 이때 만세 운동을 위해 집결한 하조대 뒷편의 고개를 “만세고개”라고 부르는 데서 알 수 있다. 또한 굳이 군수나 면장이나 구장(리장)등의 관공리를 앞장 세워 만세를 부르게 한 것도 이와 같은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개성에서 일인 군수에게 만세를 부르게 한 것과 경남 진주 시위에서 군수 민인호를 “사로잡아 제복과 제모를 벗긴 후 같이 독립만세를 부르게 한” 경우나 함안 가야면 시위 때 관헌들에게 만세를 부르게 한 경우 등이다. 이같이 만세를 부르게 한 것은 관리들로부터 항복을 받는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 수원 김향화와 33인의 기생들은 3•1만세시위에 앞장썼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만세운동에서의 무기는 없었다. 다만 시위 도구는 있었다. 그것이 바로 깃발과 구호와 노래였던 것이다. 깃발은 태극기였고, 구호는 ‘조선(대한)독립만세’가 주였고, 노래는 ‘애국가’가 주였다. 물론 태극 깃발 외에도 농민들이 사용한 ‘농기도 사용되었듯이 노래도 ’애국가‘뿐만 아니라 교가, 찬송가, ’아리랑‘ 그리고〈애국가〉류와 〈독립가>류도 불렸다. 이중에 애국가와 독립(운동)가가 가장 많이 불린 노래이다. “이때에 일본 헌병이 쫓아와서 제일 선두에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만세를 외치던 최석일의 태극기를 든 바른팔을 무도하게 일본도로 내리쳤다. 최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자기 팔과 함께 떨어진 깃발을 얼른 왼손으로 주워들며 그냥 만세를 불렀다. 헌병은 다시 그 왼팔마저 칼로 내리쳤다. 최는 양팔을 다 잃었지마는 안색이 오히려 태연하여 입만으로도 만세를 계속하였다. 악귀와도 같은 일본 헌병은 이번에는 이미 피투성이가 된 최의 목을 쳐서 그는 장렬하게 순사했다. 이같이 최가 쓰러져 죽자 그 바로 뒤에서 행진하던 김사걸이 최가 떨어뜨린 태극기를 주워들고 계속 앞장서서 나갔다. 이번에는 헌병 보조원이 짐승을 죽이는데 사용하던 쇠 갈구리를 들고 달려들어 그의 배를 쳐서 질질 끌고 가던 도중 일본인 헌병이 총탄을 발사해 죽고 말았다.“ 이상과 같은 상황은 경남 창원군 진북면 사동리 시위에서 김수동(金守東)의 경우이기도 한데, 이처럼 태극기는 시위에서의 중요한 도구였음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다. 3•1운동 중 일제의 제암리 학살에 이어 두 번째로 악명 높은 정주 학살 사건 그리고 진북 학살사건에서 태극기의 위상을 확연히 볼 수 있었다. “3월 1일 오후 1시였다. 남녀교인들과 시내 지식계급에 속하는 유지들이 식장인〈숭덕학교〉교정으로 모여들어 장내는 1천 수백 명에 달했다. 선교사 모페트(馬 布三悅)도 내빈석에 와 앉았고 일본인 경찰인 사복형사들이 경비진을 지키고 있었다. 봉도식(奉悼式)은 찬송가와 기도로 간단히 조의를 표하고 끝나자 돌연히 대형 태극기가 단상에 게양되어 군중들은 꼭 10년 만에 다시 대하는 국기인지라 한편 놀라고 한편 기뻐 주목할 즈음, 도인권(都寅權)이 단상에 뛰어올라 이제부터 ‘조선독립선포식’을 거행하겠다고 그 취지를 설명했다. 이어서 목사 정일선(丁一善)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목사 강규찬이 연설했다. 식은 목사 김선두가 사회하였고, 애국가 봉창은 삽시간에 감격과 흥분의 도가니로 화하였는데 승덕학교 교사 황찬영과 윤원삼은 미리 준비했던 태극기를 날라다가 군중에게 나누어 주자 만세소리가 우뢰와 같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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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3] 독립신문의 애국가운동독립신문의 애국가운동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4 김연갑 국가상장연구회 위원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5.02.18 11:22:09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한국문화신문 = 김연갑 국가상장연구회 위원] 1895년 청일전쟁의 승리로 조선에 대한 입지가 강화된 일본은 1898년 시베리아 철도 부설과 부동항 확보를 최우선으로 삼은 러시아와 조선을 사이에 두고 충돌했다. 이러한 상황에 주눅이 든 고종은 급기야 1882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옮겨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미국의 지원으로 러시아에 망명정부를 세우고 싶다.”며 ‘조미수호조약’대로 조선을 도와줄 것을 미국에 기대하는 나약함의 소유자였으니 그럴 만도 하였다. ▲ 독립신문 폐간 까지의 로고 , 글판과 영문화 이러한 상황을 국가의 위기로 인식한 일부 지식인들, 이를 테면 서재필과 같은 인물들은 국권수호와 자주독립을 위하여 국민을 계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곧 계몽을 목적으로 한 신문의 창간으로 바로 독립신문이다. 이 신문의 ‘독립’ 용어 사용은 1894년 음력 12월 12일 고종이 종묘에 올리는 고유문(告由文)에서 처음 쓴 것을 시작으로 세 번째 사용으로 독립신문은 제호에 태극무늬까지 넣어 시대정신인 ‘독립’을 사시(社是)로 제시하였다. 이 신문의 ‘독립’은 국가 구성원 모두가 새로운 문명에 눈을 떠 인권을 존중하고, 국민 각자가 직분을 다하여 나라의 부강을 통해 세계 국가로 자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애국심 발양을 국권수호의 기본 강령으로 삼아 신문을 통해 실천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국가가 자주권을 유지하려면 국민이 민족적 자부심과 애국심도 가져야 한다.”며 천부지성(天賦之性)이 자주 국권을 지키는 정신적 원동력이라고 주장했다. 애국심은 국민이 국정의 참여를 허락해 주고 민권을 신장시켜 줌으로서 민중이 나라를 자기의 것으로 생각할 때에 형성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인식에서 독립신문은 <애국가 지어 부르기>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실천의 한 결과가 3년 동안 13편을 게재하고 논설에서 애국가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는 분명히 애국계몽이라는 지향점을 갖는 실천운동의 결과로 우리 역사 최초의 ‘애국가 개창운동(皆唱運動)’인 셈이다. 이로부터 종래의 잡가나 민요 형태인 3․4조나 4․4조 운율에 매 행 띄어 쓰지 않고 2행 1구를 만들어 상하 양단에 나누어 쓰는 형식에서 가창에 적합한 4절 내외의 형식과 ‘합가’(合歌)라는 형태도 나타나게 되었다. 이때의 합가는 일반적인 후렴과 같이 되풀이 부르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노래하는 것을 말하는데, 찬송가 곡조에 맞춰 부를 수 있는 것 등 다양한 형태였다. 형식으로는 전통적인 것에서 가깝지만 그 내용은 한결같이 우리나라, 자주독립, 만세, 애국, 하나님, 충군, 태극기, 부국강병 등 시대상을 반영하는 말들로 이루어져 그 대의를 담은 새로운 노래들임이 분명하다. 이때 여기에 참여한 이들은 각계각층으로서 학생, 주사(초급 공무원), 기사, 군인, 예수교인 등이다. 이들은 투고(投稿)시에 직업과 주소까지도 밝히고 있음이 이색적이기기도 한데, 중류층이나 서민층에서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이 강렬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렇게 독립신문은 독립협회의 격려에 의하여 독자들에 의해 기고한 각종의 애국가란 이름을 붙인 가사들이 많이 게재되었다. 독립신문은 애국가에 대해 사설은 물론 ‘잡보란’을 통해서도 그 필요성과 기능에 대해 계몽했다. 예를 들면 <관립소학교>가 훈련원에서 개최한 운동회에서 애국가를 부른 상황을 보도한 것이나 ‘대죠션 셔울 야소교회가 대군주 폐하 탄신 경축회에서 애국가를 부를 예정’이라는 보도, 그리고 ‘조선졍부 학교가 학교에 국기를 게양하고 아침마다 애국가를 부르게 된다는 사실’ 등을 보도한 것이 그것이다. 1896년 4월 7일 창간, 1899년 12월 4일 폐간까지 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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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 장준하의 감동적인 애국가 증언장준하의 감동적인 애국가 증언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 김연갑 국가상장연구회 위원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5.01.17 12:06:26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한국문화신문 = 김연갑 국가상장연구회 위원] 한 정치인의 “애국가는 국가가 아니다. 따진다면 아리랑이 국가다”라는 발언이 애국가담론의 주제가 되었음이 현실이다. 이는 헌법에 국호(대한민국), 국기(태극기)는 규정하고 있으나 국가(애국가)에 대해서는 규정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60년대 이후 많은 논란(작사자 논란, 가사 개정 논란, 작곡 표절시비, 국가제정 논의 등)이 있어왔기 때문인 듯하다. 이에 <한국문화신문>에서는 근대사 자료수집가로 애국가 관련 논문을 발표하고, 작사자 논쟁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국가상장연구회’ 김연갑 위원로부터 애국가 논란의 배경과 진행과정을 자료 중심으로 풀어가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특히 독자여러분의 이의 제기나 사료비판을 적극 수용하여 애국가 역사 정리에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편집자말) 1981년, 나는 아리랑을 ‘민족의 노래로’ 인식하고 가슴에 담아 오다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 ‘역사의 노래’ 애국가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것은 연신내 골목 헌책방에서 산 장준하의 《돌베게》라는 책이다. 일제 학병으로 갔다가 부대를 탈출하여 중국군 준위로 입대하고, 다시 광복군에 참여하다 해방을 맞아 조국으로 환국하는 과정을 한숨과 격정으로 단숨에 읽게 한 책이다. 그런데, 김구선생과 환국하는 과정의 애국가 기술 부분에서 눈물지으며 따라 부르다 책장을 적시는 뜨거운 감동을 겪었다. 내 20대와 비교되는 민족사 속의 꿋꿋한 삶을 마주하고 큰 자각을 하게 되었다. 지금도 암송하는 이 대목! 애국가의 힘과 필요성을 절감하게 하였고, 이후 아리랑과 함께 30여년을 매달려오게 하였다. 나에게 ‘애국가는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준 대목을 다시 떠올리며, 나의 ‘애국가 찾기’를 시작 하고자 한다. ▲ 대한민국임시정부 환국기념 사진 (국가보훈처 제공) 김구선생은 1945년 11월 23일, ‘조선을 지극히 사랑하는 위대한 영도자’로 평가했다는 미군 하지 중장(J. R. Hodge, 1893~ 1963)이 마련한 미군 수송기편으로 단지 ‘임정요인의 한 사람’이란 자격으로 환국 제1진으로 귀국했다. 선생을 수행한 장준하는 비행기 창으로 한반도가 보이자 창가를 향해 감동적으로 애국가를 부르는 장면을 기술하였다. “누구의 지휘도 없이 ‘동해물과 백두산이…’합창으로 엄숙하게 흘러나왔다. 비행기 속 공기를 흔드는 노래 소리는 어느덧 울음 섞인 노래가 되었다. 애국가는 우리들의 심장에 경련을 일으키면서 조국을 주먹 안에 움켜잡은 듯이 떨게 했다. 드디어 애국가는 끝까지 부르지 못하고 울음으로 끝을 흐렸다. 기체 안의 노 투사 김구마저도 마치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이기지 못하고, 펑펑 울 수밖에 없었다. 그 어느 누가 이 애국가를 울지 않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존하세.’ 노래를 부르는 입모양인지, 웃음을 억누르는 모습인지, 분간할 수 없는 표정으로 발음을 못하고 입술을 깨무는 노 혁명가의 감격. 감상을 내어버린 지 오래고 울음을 잊어버린 지 이미 옛날인 강인한 백범선생, 그의 두꺼운 안경알도 뽀오얀 김이 서리고 그 밑으로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르 번져 흘렀다. ‘조국을 찾고 눈물도 찾으셨구나’ 나는 마치 한 소년처럼 여울지는 가슴을 느끼며 어깨를 두 팔로 감싸 안았다.” 광복과 환국의 감격을 표현해야 했고, ‘대한 사람 대한으로’라는 만남을 꿈꾸며 부를 노래가 애국가 말고 또 있겠는가?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개원식은 물론, 1940년 중경임시정부 광복군 성립식에서도 광복과 환국을 그리며 불렀던 노래가 애국가가 아니었던가? ▲ 장준하 지은 《돌베게》 김구와 장준하와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하며 감격으로 애국가를 부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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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립 잡기노트]김연갑 위업 쾌거, 영화 ‘아리랑’ 전단복원인쇄하기 닫기 사회 > 사회일반 [신동립 잡기노트]김연갑 위업 쾌거, 영화 ‘아리랑’ 전단복원 등록 2014-10-07 22:42:20 | 수정 2016-12-28 13:28:51 【서울=뉴시스】영화 ‘아리랑’의 복원된 전단. 신나라레코드가 1만매를 제작했다. 【서울=뉴시스】신동립의 ‘잡기노트’ <464> 1926년 10월1일 오후 7시 서울 단성사에서 개봉한 춘사(春史)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의 전단이 복원됐다. 88년 전 일제경찰은 이 영화 선전지 1만매를 압수했다. ‘아리랑 노래 중 공안을 방해할 가사’를 문제 삼았다. 이 팸플릿은 그동안 1장도 발견되지 않았다. 한겨레아리랑연합회는 개봉 전후 광고문구를 통해 전단의 내용과 함께 ‘공안을 방해할’ 노랫말을 찾아냈다. 10월1일 광고에는 있고, 10월3일 광고에서는 삭제된 ‘문전에 옥답은 다 어디로 가고 쪽박에 신세가 웬일인가’다. ‘아리랑’ 개봉 이틀 뒤인 1926년 10월3일 매일신보는 "아리랑-선전지 압수, 내용이 불온, 작일 밤부터 시내 수은동 단성사에서 상영한 ‘아리랑’의 활동사진 광고 팜프랫토 중에 아리랑 노래 중 공안을 방해할 가사가 있음으로 경찰당국에서는 9월30일에 선전지 1만매를 압수하였다더라”고 전했다. 개봉 전날 모두 압수당했다는 보도다. 【서울=뉴시스】영화 ‘아리랑’ 사라진 ‘아리랑’ 전단 복원은 ‘농중조’ 전단과 ‘아리랑’ 광고(조선일보·매일신보) 덕분에 가능했다. 같은 조선키네마 주식회사가 ‘아리랑’보다 석 달여 앞서 선보여 나운규의 성가를 높인 영화 ‘농중조(籠中鳥)’의 전단에 근거한 복원이다. ‘농중조’ 전단은 ‘아리랑’의 제작사가 만들었다. 나운규는 ‘농중조’에 출연했다. ‘아리랑’의 감독 겸 주연도 나운규다. 따라서 이들 두 영화의 전단 형태는 같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같은 전제 하에 조선일보 1926년 10월 1일자 5단 광고, 3일자 매일신보의 전단 압수 기사와 5단 광고를 살피면 실타래가 풀린다. 전단 압수 사실을 전한 기사는 주제가가 불온하다고 했을뿐 가사는 밝히지 않았다. 답은 뜻 밖에도 이틀 전 신문광고에 담겨 있다. ‘현대비극 웅대한 규모! 대담한 촬영술 조선영화사상의 신기록! 당당봉절(堂堂封切) 촬영3개월간 제작비용 1만5000원 돌파! 보라! 이 눈물의 하소연! 일대 농촌 비시(悲詩)! 10월1일 봉절. 매석 7시 시영(每夕七時 始映) 조선키네마 초특작 주옥편. 눈물의 아리랑, 웃음의 아리랑, 막걸리 아리랑, 북구(北丘)의 아리랑, 춤추며 아리랑, 보내며 아리랑, 떠나며 아리랑. 문전에 옥답은 다 어디로 가고 쪽박에 신세가 웬일인가! 현대비극 아리랑 전8권. 누구나 보아 둘 이 훌륭한 사진. 오너라, 보아라. 감독 쓰모리 히데가츠(津守秀一)씨, 원작각색 춘사, 주연 나운규 신일선, 출연자 나운규씨 남궁원씨 신홍련(신일선)씨 주인규씨 이규설씨. 대봉절장 단성사.’ 【서울=뉴시스】영화 ‘아리랑’ 조선일보 광고 1일자 조선일보 광고에는 ‘문전에 옥답은 다 어디로 가고 쪽박에 신세가 웬일인가’라고 명기돼 있다. 3일자 매일신보 광고에는 이 노랫말이 ‘근사 초일 대만원(謹謝 初日 大滿員)’이란 문구로 교체됐다. 이 가사를 트집 잡은 일제가 전단을 전량 압수한 것이다. 1929년 나운규 생존 시 발행된 영화소설 ‘아리랑’에 수록된 악보는 아리랑 4절을 수록했다. ‘후렴-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1.나를 버리고 가는 님은 십리도 못가고 발병나네 2.청천하날엔 별도 만코 우리네 살림사린 말도 만타 3.산천초목은 젊어만 가고 인간에 청춘은 늙어가네 4.풍년이 온다네 풍년이 온다네 이 강산 삼천리에 풍년이 온다네.’ 여기에 신문광고에서 확인된 노랫말 ‘문전에 옥답은 다 어디로 가고 쪽박에 신세가 웬일인가’를 더하면 아리랑은 마침내 5절로 완결된다. 【서울=뉴시스】영화 ‘아리랑’ 매일신보 광고 ‘아리랑’ 전단 복원은 기미양(영화 ‘아리랑’ 연구가), 김연갑(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김종욱(‘실록 한국영화총서’ 저자) 등 사계의 권위 3인의 2년에 걸친 노고의 결실이다. 김연갑 상임이사는 "복원작업을 통해 ‘아리랑’은 치정이나 항일을 앞세운 영화가 아니라 당시 살 길을 찾아 북간도로 떠나는 식민지 농촌 백성들의 비참한 현실을 묘사, 관객이 ‘나의 영화’로 인식하게 함으로써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고 밝혔다. 조선총독부는 농민들이 북간도로 이주해 항일운동을 확산할 것을 우려했고, 나운규는 ‘아리랑’으로 총독부의 토지조사 등 식민정책에 저항했다는 점을 ‘아리랑’ 전단이 확인해준 셈이다. ‘아리랑’의 주제가 아리랑은 이후 ‘항일의 노래’ ‘조국의 노래’로 널리 불렸다. 광복 후에는 통일을 염원하는 ‘통일의 노래’가 됐다. 남북 공히 ‘민족영화 1호’로 손꼽는 ‘아리랑’은 필름도, 시나리오도, 포스터도 남아있지 않다. 【서울=뉴시스】영화 ‘농중조’(감독 이규설) 전단 ‘아리랑’ 전단 복원, 이것은 영화사의 기념비요 금자탑이다. 온라인편집부장 reap@newsis.com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쇄하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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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정신을 담은 나운규의 아리랑 / YTN 사이언스민족정신을 담은 나운규의 아리랑 / YTN 사이언스 오랜 세월 우리 민족과 함께 해온 노래, 아리랑그런데 우리에게 익숙한 이 아리랑이 백 년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 아리랑이 만들어지고 불려지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한 편의 영화였다1926년 일제강점기에 발표된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이 영화가 우리 영화사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민요 '아리랑'과는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한국 영화 초기의 무성영화가 우리 영화사에 전환점이 된 영화이자 우리 민족의 노래를 심어놓은 작품 '아리랑'왜 '아리랑'을 주제로 영화로 만들었고, 그 작품에 담고자 했던 것을 과연 무엇일까?'아리랑'에 담긴 정신을 풀어가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