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아리랑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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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하이 서울 <퓨젼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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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강연 - 아리랑을 통해 본 경산아리랑의 가치 재발견/김연갑특별 강연 - 아리랑을 통해 본 경산아리랑의 가치재발견 - 창작아리랑의 형태로 세계인류무형유산 등재 아리랑의 곡으로 포함되어 있는 경산아리랑의 가치를 영상화된 강연으로 만나볼 수 있는 강연과 강연 실황 영상콘텐츠 작업 진행. - 경산아리랑의 가치 확산과 대중화이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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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칼럼: 다시 읽는 'Song of Ariran (1)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기찬숙/아리랑학회 연구이사 금년은 아리랑에 관한 책으로 매우 의미있는 ‘Song of Arirang’이 간행된지 80년을 맞는 해이다. 아리랑 역사의 빛나는 보석 같은 존재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아리랑’을 표제로 한 책은 10여종에 이른다. 1945년까지의 상황으로는 1930년대 초 창가집류가 5종으로 ‘映畵名曲아리랑唱歌’(1930), ‘아리랑民謠集’(1930), ‘現代映畵아리랑唱歌集’(1931), ‘아리랑民謠集’(1931), ‘현대유행신아리랑창가(’1932)가 있고, 1935년 이후 일본어 표기 의 ‘朝鮮民謠アリラン’(1935년 김지연)과 소설 ‘ありらん峠’(1938년 김문집)가 있다. 그리고 영어로 쓰여진 ‘Song of Arirang’이 있다. 이중에 마지막의 영어로 쓰여진 것은 1941년 의외의 미국에서, 의외의 미국인 여기자 님 웨일스(Nym Wales. 본명:Helen Foster Snow, 1907~1997)가 조선인 김상의 생애를 전기체로 쓴 책이다. 창가책 5종은 (사)아리랑연합회 소장자료로 서지사항이 밝혀졌고, 일본어 표기 중 김지연의 ‘朝鮮民謠アリラン’에 대해서는 필자의 연구논문이 있고, 김문집의 단편집 ‘ありらん峠’ 역시 최근 연구논문(동의대 신용주)이 발표되어있다. 그러나 ‘Song of Arirang’에 대해서는 그 유명세에 비해 서평에 머무르는 듯하다. 필자는 학부 졸업논문으로 ‘Song of Arirang’ 소재 아리랑 연구‘를 제출하면서 이 책을 탐독했다. 2001년 스터디 모임 ‘아리랑아카데미’에서 백선기(소설가 김팔봉의 서랑)선생과 김연갑선생으로부터 님 웨일즈 방문기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2005년 주인공 김산(1905~1938)의 아들 고영광 선생을 초청, 부친의 건국훈장 애국장 서훈식 참석을 도운 바 있다. 이 과정에서 필자는 그동안 책을 통해 풀지 못한 몇 가지 문제를 해결했다. 예컨대 저자 님 웨일즈가 노벨상에 두 번(1981~2)이나 노미네이트(nominate) 되었다고 했는데, 그것이 'Song of Arirang'을 대상으로 한 문학상인지의 여부였다. 결과는 중국 속의 조선인 항일투쟁가들을 기록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고발했다는 평가로 문학상이 아닌 평화상의 후보지명이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또한 님 웨일즈는 김산에 대해 단순한 취재원이었을 뿐인가라는 의문이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갖고 있는 의문이었을 것인데, 직접 만난 두 분과 고영광선생의 증언으로는 3개월 간 22회의 ‘밀회 같은 인터뷰’이었을 뿐이고, 고매한 열정의 혁명가를 격려하는 관계였을 뿐, 연인 관계까지 갔다는 증거는 없다고 했다. 그리고 1938년 10월 19일, 중국 공산당 사회부장 캉성(康生)의 명령으로 처형되었을 때, 그 죄목은 무엇이었는가라는 문제다. 이는 아들 고영광에 의한 복권(1983년) 신청과 심사 과정에서 밝혀졌는데, ‘반혁명죄와 간첩죄’였다. 즉, 트로츠키(Leon Davidovich Trotsky)파라는 이유와 일본 경찰에서 큰 고초 없이 풀려난 것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간첩죄로 몰렸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복권 심사과정에서 확인되었다. 공산당 문서에서는 "변명하지 않는 미련한 자”란 기록과 일본 기록에는 "결코 변절하지 않을 놈”이란 기록이 나와 결국 무협의로 복권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풀지 못한 문제가 있다. 일본의 이회성 작가나 중국의 고영광 등에 의해 자료가 발굴되면서 해결되었으나, 정작 ‘아리랑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였다. ‘아리랑 문제’란 김산이란 인물 연구와 Song of Arirang이란 텍스트 연구의 근본 문제인데, 결정적으로 과연 김산은 언제, 어떤 계기에 아리랑을 접하고, 가슴으로 인식하게 되었는가라는 의문이다. 혁명에 대한 신념만큼이나 돋보이는 아리랑에 대한 명징한 표현들은 단순한 이해 정도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지식인들, 이광수도, 최남선도, 김소운도 여기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모든 서평이나 김산을 언급하는 이들이 하나 같이 하는 말에는 "님 웨일스라는 탁월한 기록자가 연안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장지락(김산의 본명)은 그의 다른 무수한 동지들처럼 홍진에 묻혀 사라졌을 것이다.”라는 표현을 한다. 그러나 ‘무수한 동지들’ 중에 이토록 아리랑을 절절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인물은 오직 김산 한 사람뿐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유난히도 높고 깊은 고개를 넘고 넘은 그의 생애에서 알 수 있다. 1917년 개신교 계열 중학교에 진학, 3.1 운동에 참가하다 체포되어 3일간 구류 처분을 계기로 도일하였다. 1922년 상해로 가 김성숙을 만나 마르크스주의를 배우고,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베이징 지부에 입당하고, 공산주의 잡지 ‘혁명’을 간행하고, 1926년 ‘혁명동맹’ 편집을 맡아 선언문을 작성했다. 1927년에는 황푸군관학교 교관을 맡으며 1930년까지 홍콩, 상하이, 베이징 등지에서 활동하다 베이징 경찰에 체포, 일본 영사관으로 넘겨진 뒤 조선에서 심문을 받다 다음해 4월 풀려나 다시 베이징으로 가서 사범학교 교사로 생활했다. 1933년 4월 중국 국민당 경찰에 붙잡혀 다음해 탈출하였다. 이후 잠시 철도 노동자로 일했고, 1936년 7월에 상하이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창설하고, 8월에는 조선 혁명가 대표로 선발되었다. 1937년에는 항일 군정 대학에서 물리학, 화학, 수학, 일본어, 한국어를 강의하였다. 님웨일즈를 만날 때까지의 이 굴곡진 역정을 김산 말고 산 이가 또 있는가. 분명 이 파란의 과정에서 김산은 아리랑을 접하고 이해했을 것이다. 그 구체적인 계기는 언제, 어디서였을까? 참고: <김산. 그리고 아리랑> www.arirangnar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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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님웨일즈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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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의 아리랑 행사 연보(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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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버트가 채보한 ‘구아리랑’과 나운규의 ‘신아리랑’/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홈 우리문화 톺아보기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헐버트가 채보한 ‘구아리랑’과 나운규의 ‘신아리랑’ [국악속풀이 320] 서한범 명예교수 suhilkwan@hanmail.net 등록 2017.06.19 23:50:46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한국의 아리랑은 지난 2012년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2014년에는 북한의 아리랑민요가 역시 등재되었기에 아리랑은 한반도를 넘어 세계인의 노래 유산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지난주에 하였다. 정선아리랑을 비롯하여 서울 경기지방의 본조(本調)아리랑, 경상도의 밀양아리랑, 전라도의 진도아리랑 외에도 문경아리랑, 상주아리랑, 해주아리랑, 대구아리랑, 공주아리랑, 영천아리랑, 용천아리랑, 등등 지역의 특징적인 아리랑은 수도 없이 많다는 이야기,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기도 했지만, 식민지 시절, 아리랑을 금지곡으로 지정하자,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각 지방에서 부르기 시작했으리라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또 무엇보다도 아리랑의 음악적 특징은 간결하면서도 정제되어 있는 형식과 선율형이 간단해서 쉽게 부를 수 있다는 점, 3박자형의 리듬구조, 지역마다의 시김새가 다양하다는 점, 그 중에서도 특히 떠는 소리의 형태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또한 즉석에서도 지어 부를 수 있는 풍부한 노래말이라든가, 박자의 조절이나 감정의 상태에 따라 슬픔과 기쁨 등 음악적 분위기를 바꾸어 부를 수 있다는 점, 등을 이야기 하였다. 이번 주에는 이처럼 한국인이 좋아하고 잘 부르는 민요, 아리랑은 누가 지었고, 언제부터 불러온 노래일까? 하는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겠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해답은 찾기 어렵다. 다만, 1800년대 중반, 경복궁을 중건할 때, 각 지역에서 차출된 인부들을 위한 연희에 사당패들이 초청되어 각 지역의 아리랑을 불렀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아리랑은 그 곳에 참여한 일꾼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파급되기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 정도이다. 그 이후 1896년에 외국인 선교사 헐버트(hulbert)가 당시 부르던 아리랑을 서양의 5선보로 채보하였는데, 이 곡은 현재의 아리랑이 아닌 그 이전에 불러오던 <구 아리랑>이다. ▲ 아리랑을 서양의 5선보로 채보한 외국인 선교사 헐버트(hulbert) ▲ 헐버트의 아리랑이 수록된 `The Korean Repository`(1896년) 악보(문경시 옛길박물관 제공) 당시 불려지던 아리랑은 박자도 느리고, 가락도 부분적으로는 현재의 아리랑과 다른 형태이다. 가령 현재의 아리랑은 시작부분의 “아리랑, 아리랑”이란 노래말에서 앞에 것은 쏠(sol)로 낮게 시작하고, 뒤에 것은 도(do)로 4도 높게 내서 <쏠-도>의 서로 다른 음높이로 부르지만, 구아리랑은 시작부분의“아리랑, 아리랑,”을 동일한 음높이로 반복하는 차이를 보인다. 구아리랑이 채보된 30년 뒤, 1926년, 단성사에서는 나운규의 <아리랑>이라는 영화가 상영되었는데, 여기에 주제곡으로 쓰인 아리랑은 헐버트가 채보했던 <구아리랑>이 아니라, 영화를 위해 새롭게 편곡된 <신아리랑> 이었다. 그러니까 현재 전국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아리랑이 바로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속의 아리랑이란 노래가 영화와 함께 관람객의 민족 감정을 폭발시킨 것이다. 영화 속의 주인공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는 애절한 장면을 목격하면서, 동시에 배경 음악인 아리랑을 가슴으로 듣게 되면서, 억압받으며 살던 관객은 항일감정을 여지없이 폭발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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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7] 3ㆍ1만세운동 기간 애국가는 국가(國歌)였다3ㆍ1만세운동 기간 애국가는 국가(國歌)였다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7]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8.03.02 11:13:42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3ㆍ1만세운동 초기 ‘애국가를 불렀다’를 ‘national cry’로 표기한 세브란스의전 오웬스가 1919년 3월 24일 <브리스조사위원회(Bryce Viscoint Investing Commission)> 소속 오웬스가 보낸 보고서 일부 애국가 역사에서 고유 곡명 ‘애국가(愛國歌)’ 시대와 ‘국가 애국가(國歌 愛國歌)’는 구분 된다. 1902년 대한제국이 윤용선을 책임자로 하여 <대한제국애국가>(大韓帝國愛國歌)를 제정하게 했다. 당시 일본 <기미가요>를 작곡, 정착, 일반화 시키고 독일로 귀국한 후란츠 에케르트(FranzEckert/1852~1916)를 초청하여 작곡한 것이다. 이를 고종에게 천거한 이는 민영환으로 이미 유치호 등을 인솔하여 1896년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갔다 근대식 의전(儀典) 절차를 보고 군제를 러시아식으로 삼으며 국가의 필요성을 인식한 결과였다.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으소서 성수무강하사 해옥주를 산같이 쌓으소서 위권이 환영에 떨치사 어천만세에 복록이 무궁케하소서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으소서 작사자를 악보의 서문을 쓴 민영환으로 보기도 하나 분명치 않고 작곡자는 악보 표지에 분명하게 에케르트를 작곡자로 밝혔다. 이 애국가는 1902년부터 1909년까지 대한제국의 국가로 공립학교와 군대에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서양정서에 장중한 분위기로 또한 가사의 난해함으로 일반화 되지는 못했다. 이런 까닭으로 윤치호의 <무궁화가>가 애국가로 불리게 되었고, 1907년에 와서 새롭게 작사된 <애국가>가 널리 불리게 되었다. 이런 길항(拮抗 서로 버티어 대항함) 관계는 1909년 전후까지로 추정된다. 이런 정황으로 공식적인 국가(國歌)는 약 7년 정도 존재한 <대한제국애국가> 뿐이다. 그러므로 임시정부 이전까지 나라를 사랑한다는 의미를 지닌 ‘애국가’는 존재했어도 나라가 제정한 또는 나라가 인정한 ‘국가 애국가’는 없었다고 본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학계의 인식이었다. 그러니까 현 <애국가>가 단순한 명칭으로서의 ‘애국가’를 넘어 나라가 인정한 ‘국가로서의 애국가’는 1919년 3ㆍ1만세운동 이후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개원식에서 불림으로서 부터라고 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필자가 발굴한 자료를 통해 보면 적어도 현 애국가가 이미 <대한제국애국가>의 생명이 끝나는 1909년말부터 그 정통성을 계승하여 ‘나라가 인정한 국가 애국가’로 불렸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는 유감스럽게도 3ㆍ1만세운동 정황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외국 선교사의 보고서에서 확인이 되는데, 당시 세브란스의전(Severance Union Medical College) 선교사들의 소속 <브리스 조사위원회(Bryce Viscoint Investing Commission) 소속> 오웬스 목사(Donald D. Owens, 한국명 오은수)가 작성한 보고서이다. 1919년 3월 24일 위원회에 보낸 것이다. ▲ 3ㆍ1만세운동 초기 ‘애국가를 불렀다’를 ‘national cry’로 표기한 세브란스의전 오웬스가 1919년 3월 24일 <브리스조사위원회(Bryce Viscoint Investing Commission)> 소속 오웬스가 보낸 보고서 일부 내용은 일본의 식민정책, 일본의 개혁 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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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6] 서재필이 기사로 밝힌 ‘애국가’ 작사자서재필이 기사로 밝힌 ‘애국가’ 작사자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6]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7.12.18 11:40:42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1897년 7월 17일 낮 3시, 서대문 독립문 옆 <독립관>에서 조선 개국 505회 경절회(慶節會) 행사가 있었다. 이날은 조선이 개국한 날이라 기념식을 한 것으로, 사상최초의 민관합동 개국 기념식이었다. 강단에는 국기(태극기)를 게양하고 꽃 장식을 하고 하단에는 예복을 갖춰 입은 외국 공관원과 정부 고관들이 자리했고, 객석에는 관인들과 학생들, 그리고 일반인들도 자리했다.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사가 주최했고 정부 재산을 관리하는 탁지부가 재정지원을 했고, 진행은 배재학당 교사와 학생들이 담당했다. 강연은 서재필(독립신문 발행자/1864~1951), 아펜젤라(배재학당 설립자/1858~1902), 윤치호(전 외부 협판/1865~1945) 순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오늘의 애국가 후렴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을 쓴 <National Flower>가 불렸다. 이 노래는 이후 ‘무궁화노래’ 또는 ‘무궁화가’로 표기되어 전승되었다. ▲ 영자신문 1897년 8월 17일자 가운데 ‘무궁화노래’ 기사 갈무리 이런 사실은 1897년 8월 17일자 영자신문 <independent>에 기록되었다. 기록자는 Jaishon, P, 곧 서재필이다. 이 기록은 그동안 영문판 독립신문 <editorial note>에 실렸는데 최근에야 필자가 발굴한 기사이다. 애국가 사료로서는 일대 획을 긋는 사료이다. 이 날의 기념식을 위의 기사를 통해 구체적으로 살피면 다음과 같다. 120년 전 기념행사는 낮 3시에 시작하여 5시에 마쳤는데, 배재학당 학생들의 ‘찬양’(Praise)으로 시작되었다. 독립협회 회장 안경수가 먼저 인사말을 했고, 외국인 참석자들을 소개했다. 이어 병중인 학부대신 이완용을 대신하여 한성판윤 이채연이 국가주의를 주창하는 연설을 했다. 그리고 배재 학당원들은 ‘무궁화노래’(National Flower)를 불렀다. 이어 당시 연희전문을 설립한 아펜젤러 목사가 등단, ‘조선거주 외국인들의 의무’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이어 서재필 박사가 ‘한국의 발전’을 주제로 강연했다. 그리고 마지막 강연자인 윤치호가 나와 강연을 했다. 윤치호의 강연 제목은 <우리가 기념하는 날>로 주제는 “청국의 역사는 잘 알면서 우리 역사는 모르는 것이 현실”이라는 요지로 청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했다. 그리고 서재필은 이 날 부른 노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기술했다. ▲ 영자신문 에 ‘무궁화 노래’ 기사를 올린 서재필의 만년 모습 “배재 청년들이 ‘무궁화노래’를 불렀다. 한국의 계관시인 윤치호가 이날 행사를 위해 작사한 것이다. 학생들은 이 시를 스크랜턴 여사가 오르간으로 반주하는 ‘올드 랭 사인’ 곡조에 맞춰 불렀다.” 다른 노래에 대해서는 ‘배재 학생들의 찬양’과 같이 의례적인 표현을 했는데, 두 번째 노래는 상세하게 기록한 것이다. 특히 윤치호를 ‘계관시인’(Poet Laureate)이라고 칭하여 작사자임을 명확히 했다. 이 기록은 거의 120년간 밝혀지지 않은 것으로, “현 애국가를 윤치호로 인정한다 해도 동일 후렴이 이미 1897년부터 불려 왔으니 그 후렴이 포함된 <무궁화노래>가 윤치호 작사라는 증거가 없는 한 애국가 작사자를 단정할 수 없다.”라는 주장이 1970년대부터 중요한 논거로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사실은 1897년 8월 17일자 영자신문 <independent> 서재필 기사가 2015년에 밝혀짐으로서 애국가 작사자를 명확하게 밝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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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5] ‘무궁화가’에서 ‘애국가’로‘무궁화가’에서 ‘애국가’로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5] 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7.10.25 11:34:29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보전하세” 이 후렴이 탄생 된지 120년이 되었다. 곧 오늘의 애국가 후렴이란 점에서 곧 애국가의 출현 120년을 맞은 것이다. 그런데 120년 전부터 현 애국가가 탄생하는 1907년까지는 ‘무궁화가’, ‘무궁화노래’, ‘애국가’로 그 이름을 달리하며 불렀다. 이 번 회에사는 이 ‘무궁화가의 미디어상의 전승을 살펴보기로 한다. 1.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무궁화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대한제국 지식인들은 계몽운동으로 국민들의 실력을 향상시켜 자주독립 국가로 가야함을 역설했다. 학교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언론도 이에 앞장섰다. 그래서 애국계몽 노래들을 발표하여 널리 보급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 가운데 1907년 10월 30일자 대한매일신보 잡보에 ‘무궁화가’라는 곡명의 4절 노래가 한글판과 국한문판에 동시에 게재되었다. 이 역시 이 신문의 자주독립을 각성시키기 위해 ‘무궁화’를 수록했다. 一 셩ᄌᆞ신손 오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고슈려 동반도 우리 본국일셰 (후렴) 무궁화 삼쳔리 화려강산 대한사 대한으로 기리 보젼셰 二. 츙군 일편단심 북악치 놉고 국 열심의긔 동치 깁헤 三. 쳔만인 오ᄌᆞᆨ 나라랑여 농공샹귀쳔업시 직분만다셰 四. 우리나라 우리황실 황텬이 도으샤 국민동락 만만셰에 태평독립셰 (순한글판) 一 聖子神孫 五百年은 우리 皇室이요 山高水麗 東半島 우리 本國일세 (후렴) 無窮花 三千里 華麗江山 大韓사 大韓으로 길이 保全셰 二. 忠君는 一片丹心 北岳치놉고 愛國는 熱心義氣 東海티 기페 三. 千萬人 오ᄌᆞᆨ 한마 나라랑여 士農工商貴賤업시 職分만다셰 四. 우리나라 우리皇室 皇天이 도으샤 國民同樂 萬萬歲에 泰平獨立셰 (국한문판) 한글판과 국한문판에 게재된 전 4절 가사는 앞에서 살핀 1899년 6월 29일자 독립신문 잡보란 방학예식 기사에 수록된 것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무궁화 노래’가 한자형 ‘무궁화가’로 바뀐 것이다. 2. 도산본 애국창가집 ‘제14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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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3] 1917년 수집ㆍ정리된 <애국창가집>의 가치1917년 수집ㆍ정리된 <애국창가집>의 가치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3] 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7.09.03 10:57:57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문화재청은 2011년 초 근대음악유물 등록문화재 3편을 공고했다. ‘등록문화재’ 제도는 50년 이상이 지난 것 중 역사, 문화, 예술, 사회 등 각 분야에서 기념이 되거나 상징적 가치가 있는 근대문화유산을 급격한 멸실, 훼손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서, 2001년도에는 건축물 및 시설물, 2005년도에는 동산문화재 분야에 도입한 제도이다. 이에 따라 근대기의 역사적ㆍ예술적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을 적극 발굴해 문화재로 등록함으로써 보존ㆍ관리할 예정이라고 밝히고 「광복군가집 제1집」(1943년 한국광복군 제2지대 선전위원회 펴냄), 「애국창가 악보집」(1916년 하와이 편찬 등사본), 「안익태 대한국애국가 자필악보」(1949년 필사) 세 가지를 등록했다. ▲ 1917년 수집ㆍ정리된 <애국창가집> 이상의 3가지 음악자료는 애국가의 수록을 주목한 자료이다. 처음으로 근대 음악인 애국가의 자료를 국가가 관리하게 된 것으로 바람직한 결과이다. 이 세 가지 자료에는 현 애국가의 해외동포사회 확산과 광복군 수용 사실, 그리고 안익태가 작곡했음을 입증하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자료만으로는 현 애국가의 역사를 알려주는 자료로는 부족하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사’으로 시작하는 후렴이 사용된 <무궁화가>가 작사된 것이 1897년이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달토록’으로 시작하는 가사가 작사 된 것이 1907년이고, ‘애국가’로 민중의 공인을 받은 것이 3ㆍ1만세운동기를 통해서이고, 임시정부 광복군들에 의해 불려 국가적 위상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가사 변화와 보급 상황, 특히 3ㆍ1만세운동 기간에 불린 애국가들의 상황, 많은 ‘애국가’들의 정체성도 함께 밝혀져야 함은 당연하다. 앞으로 더 많은 애국가 자료가 발굴, 정리되어 이 맥락적 간극을 메꿔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동안 발굴된 필사자료들을 주목하여 살필 필요가 있다. 이중에 1917년 수집ㆍ정리된 「애국창가집」을 실례로 삼을 수 있다. 이 자료는 지금까지 발굴된 애국창가집 중 애국가류를 인식하고 정리한 자료인데, 이는 1919년 3ㆍ1만세운동 기간 전국에서 불린 다양한 애국가의 존재를 추정 할 수 있게 해 준다. ▲ 「애국창가집」의 안창호 작사 ‘애국가’ 1910년 일제의 국권침탈로 애국가류의 작사자나 수집 정리자를 밝힐 수 없는 처지였다. 이런 까닭으로 1910년대 이후 필사된 자료에 작사자가 밝혀진 것이 없다. 이 자료집에도 각각의 작품 정보가 없음은 물론, 수집ㆍ정리자도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 자료의 핵심 가치는 ‘애국가’ 명칭 자료와 일반 애국창가를 구분하여 정리ㆍ수록했다는 점이고, 이는 곧 1917년 전후의 ‘애국가’ 명칭 자료의 실상을 알게 한다는 점이다. 전체 29종을 밝힌 목차는 다음과 같다. 애국가 1 애국가-동해물과 백두산이 2 애국가-산고수려 동반도는 3 애국가-긴날이 맛도록 4 애국가-동해의 돌출한 5 애국가-만왕 우리하나님계서는 6 애국가-우리나라 동반도난 7 애국가-화려한 강산 우리대한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