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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왜 우리는 일본의 아카지마 아리랑 고개로 가는가"인쇄하기 닫기 문화 > 문화계 "왜 우리는 일본의 아카지마 아리랑 고개로 가는가" 등록 2015-02-06 09:25:51 | 수정 2016-12-28 14:32:32 【서울=뉴시스】일본 오키나와 현 미야코지마 시의 아리랑비 【서울=뉴시스】기미양 추진단장(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 만남은 언제나 설레임을 갖게 한다. 그 설레임이 비록 아픈 역사적 사실을 만나는 일일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2월9일 일본 오키나와 현에 있는 ‘아리랑 고개’를 만나러 간다. 실재적 아리랑고개인 경북 문경새재를 노래하는 문경아리랑보존회와 함께 역사적 아리랑고개인 오키나와 아카지마 아리랑고개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아직 보름 정도를 남겼지만, 사단법인 문경아리랑보존회와 함께 문경새재를 찾아가서 만남의 설레임을 나눴다. 지난 24일 문경새재 제2관문 문경아리랑노래비 앞에서 송옥자 회장과 회원들의 아리랑을 들으면서 이 고개에 스며있는 외침과 전쟁의 상흔들을 기억해냈다. 고개는 변혁의 기점이다. 시작과 끝이 동시에 이뤄지는 곳이다. 그러므로 고개는 극단의 기점이기도하다. 전쟁이 있는 곳이기도 하고, 비로소 희망으로 가는 관문이기도 하다. 이 같은 땅의 수많은 고개는 문경새재로 상징된다. 고개 정상에 떨어진 빗방울이 반은 한강으로 가고, 반은 낙동강으로 가는 자연적 극점을 이루는 곳이기도 하지만 과거급제의 기쁘고 경사스런 소식을 듣는 고개가 문경새재이다. 뿐만 아니라 역사상 가장 높은 민중사 격변의 기점이기도 했는데, 임진왜란 시 경복궁을 불태우고 평양으로 내닫게 한 배경은 신립 장군이 문경새재 방어를 포기한 까닭이었고, 경복궁 중수 7년 공사로 수난을 당한 삼남인들의 아픈 기억과 이후의 의병전과 동학혁명, 특히 한국전쟁 시 낙동강 방어선을 놓고 남북 군인은 물론 중공군과 미군을 비롯한 UN군의 격전으로 많은 피를 뿌린 문경 전투의 사연이 이 고개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문경새재아리랑의 “문경새재 박달나무는/ 홍두깨방망이로 다나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는 이 같은 문경새재의 아픔과 상흔을 특산품의 상실감으로 표현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고개를 넘어 가는 의지를 노래한다. 이렇게 아리랑은 문경새재가 자연적이고 실재적인 고개이면서, 심상적(心象的)이면서 역사적인 고개임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연유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오키나와 현의 작은 섬 아카지마 아리랑고개는 얼마나 아프고 또한 그 깊이만큼 높은 어떤 희망이 담겨있는지를 생각하면 설레임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이 오키나와의, 아카지마의 아리랑고개도 문경새재의 사연만큼이나 깊고 높은 아픔과 희망을 담고 있지는 않을까? 3박4일 만나게 되는 ‘아리랑노래비’와 ‘아리랑고개’···. 내 땅이 아닌 일본의 외딴 섬에 있다는 이 아리랑노래비와 아리랑고개의 존재는 역사적으로도 어처구니가 없지만, 아리랑 사연으로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의외의 것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서 만나, 알고, 이해하여, 이를 아리랑정신으로 승화시키려고 한다. 저항·대동·상생이란 아리랑정신으로! 【서울=뉴시스】아카지마아리랑평화음악제 추진단이 문경새재를 찾았다. 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 송옥자 회장과 회원들, 아리랑홍보대사 송미진, 문경아리랑경창대회 최연소 수상자 박주빈(당시 3세), 상여소리 명창 금명효, 기미양 단장, 유명옥·이인영 부단장, 이준용 다큐작가. <사진= 여행작가 엄문희> 아리랑정신의 승화는 아카지마 아리랑고개에서 세계적인 평화음악제를 개최하여 태평양전쟁 종전 70주년과 한일협정 50주년의 역사적 의미를 새로운 미래 역사로 바꿔가는 것이다. 역사의 고개를 넘자는 것이다. 이의 추진을 위해 15명의 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 회원들이 앞장서서 두 개의 고개를 통한 미래 역사를 새롭게 기록해 나갈 것인가를 확인하여 지속적인 교류를 준비할 것이고,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아카지마아리랑평화음악제 추진단’이란 이름으로 진용을 짰다. 위령제와 고국의 아리랑을 올리는 공연을 위해 밀양아리랑보존회(광복군아리랑)·㈔김애경무용단(초혼무 아리랑)이 함께 하기로 했고, 류쿠국과 ‘아라리’ 교류 및 한국전쟁 직전까지 미군 위문공연연예단의 아리랑 공연들을 조사하기 위해 아리랑학회와 ㈔한국전통음악치유협회가 참가하기로 했다. 그리고 관련 지자체 등에 보고하고 출판을 위해 영상 다큐팀(이준용)과 여행작가(엄문희)도 동행하기로 했다. 조선인 종군위안부 위안소와 조선인군부 강제수용소 조사 및 증언 기록은 이인영 선생과 송미진 선생이 맡고, 특별강의 ‘누치토타가라 아리랑 담론’ 강사로 아리랑연구가 김연갑 선생도 동행한다. 특히 일본 내 아리랑 역사유적지 전문여행 기획을 위해 ㈜세종해외관광여행사 한상준 대표도 동행한다. 이번 답사에 ‘문경새재아리랑마을’에 5대째 터를 잡고 있는 김순옥 여사의 “시아버지(송영철)가 일본 징용 시절을 회상할 때는 언제나 아리랑을 불렀다”는 증언, 상여소리 명창 금명효 선생의 “탄광부였던 아버지(금인수)가 부른 탄광아리랑에는 일본말이 들어있어 징용의 사연이 담겨있다”는 증언이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설레임을 더해 주었다. 아카지마아리랑평화음악제가 아카지마를 ‘평화의 아리랑섬’으로 발신할 수 있기를 바라며 서울에서 온 추진단 일행은 문경을 떠나왔다. 서울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남북 당국이 아리랑으로 막힌 교류의 물꼬를 터야 한다’는 요지의 성명서를 읽었다. 아! 또 하나의 역사적 아리랑고개를 마주하였다. www.arirang21.org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쇄하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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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 박주빈·25세 송미진, 日아카지마 아리랑평화음악제 합류 까닭(기미양)인쇄하기 닫기 국제 > 아시아/대양주 7세 박주빈·25세 송미진, 日아카지마 아리랑평화음악제 합류 까닭 등록 2015-02-06 10:35:35 | 수정 2016-12-28 14:32:33 【서울=뉴시스】기미양 단장·아카지마아리랑평화음악제 추진단 = ‘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이 9일 오키나와로 간다. 역사적으로, 음악사적으로, 설화적 관계로, 그리고 미군위문협회(USO) 아리랑 상황이라는 다층적 관계로 오키나와는 깊은 관계이다. 이 관계의 상징이 아카지마(阿嘉島)에 있는 ‘아리랑 고개’와 그 사연이다. ‘고개의 노래’라는 아리랑이 이 오키나와 외딴 섬에서 불렸다는 아픈 사연을 전해 주는 아리랑고개는 분명 세계지도에 없는 고개이다. 이 아리랑고개와 사연을 우리 아리랑사(史)에 기꺼이 편입시키는 일을 위해 가는 것이다. 이 아카지마아리랑평화음악제 추진단에 두 진객이 함께 한다. 박주빈(7)군과 송미진(25)양이다. 사단법인 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 참가단 15명의 일원인데, 박군은 5세 때 ‘고개의 노래, 문경아리랑’ 음반 프롤로그를 장식한 꼬마 소리꾼이고, 송양은 문경아리랑의 전설적 소리꾼인 고 송영철 선생의 손녀이다. 2012년 문경시가 제작한 음반 ‘고개의 노래, 문경아리랑’은 명창 송옥자(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 이사장과 송영철(1917~2002) 선생이 생전에 남긴 문경아리랑 녹음 자료를 수록한 CD 2장이다. 첫 트랙에 귀여운 산골 어린이의 서툰 발음으로 부른 문경아리랑을 수록, 3세대의 소리를 장식한 문경아리랑경창대회 금상 수상 어린이 명창 박군이다. 이번 참가는 외할머니인 문경아리랑보존회 총무 이경숙 여사와의 동행으로 소리를 좋아하여 선뜻 가겠다고 했다. 추진단은 소리꾼으로서의 자질을 발휘하는 것이라며 환영하였고, 11일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 위안부 희생자에게 올리는 ‘헌가(獻歌) 아리랑’을 맡기로 했다. 【서울=뉴시스】기미양 단장·아카지마아리랑평화음악제 추진단 = ‘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이 9일 오키나와로 간다. 역사적으로, 음악사적으로, 설화적 관계로, 그리고 미군위문협회(USO) 아리랑 상황이라는 다층적 관계로 오키나와는 깊은 관계이다. 이 관계의 상징이 아카지마(阿嘉島)에 있는 ‘아리랑 고개’와 그 사연이다. ‘고개의 노래’라는 아리랑이 이 오키나와 외딴 섬에서 불렸다는 아픈 사연을 전해 주는 아리랑고개는 분명 세계지도에 없는 고개이다. 이 아리랑고개와 사연을 우리 아리랑사(史)에 기꺼이 편입시키는 일을 위해 가는 것이다. 이 아카지마아리랑평화음악제 추진단에 두 진객이 함께 한다. 박주빈(7)군과 송미진(25)양이다. 사단법인 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 참가단 15명의 일원인데, 박군은 5세 때 ‘고개의 노래, 문경아리랑’ 음반 프롤로그를 장식한 꼬마 소리꾼이고, 송양은 문경아리랑의 전설적 소리꾼인 고 송영철 선생의 손녀이다. www.arirang21.org 송양은 10대 때 문경의 대표적인 소리꾼이었던 할아버지(당시 27세)로부터 1943년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가 우여곡절 끝에 해방을 맞아 귀국한 사연과 함께 아리랑을 듣고 배웠다. 이후 성장하며 소리에 소질이 있음을 자각하고 본격적으로 할아버지 소리를 계승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평생 산 문경읍 하초리가 작년에 ‘문경새재아리랑마을’로 선정된 것이 계기가 되어, 송옥자 선생을 스승으로 하여 본격적으로 소리길을 걷기로 했다. 문경에서는 격대(隔代) 소리꾼의 탄생이라며 축하해 주었다. 어머니 김순옥 여사와 동행하는데, 특별히 할아버지 유품 중에 징용 때 휴대했던 소지품을 가지고 가서 할아버지를 회고하기로 했다. 그 진품은 현장에서 공개하기로 하였다. 이번 답사에서는 할아버지 무릎에서 늘 듣고 자란 ‘고개의 노래, 문경아리랑’을 징용과 징병으로 끌려가서 희생당한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헌사할 예정이다. 아카지마아리랑평화음악제 추진단은 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가 주축이 되어 실재적 아리랑고개인 ‘문경새재’와 역사적 아리랑고개인 ‘아카지마아리랑고개’의 역사적 만남을 통해, 아리랑의 역사성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느끼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답사이다. 이런 행사에 박군과 송양의 참여는 매우 뜻깊다 하겠다. www.arirang21.org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쇄하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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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부르는 아리랑 ㅣ KBS방송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부르는 아리랑 ㅣ KBS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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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의사 아리랑' 마침내 탄생, 안중근 동양평화론 현장 가다인쇄하기 닫기 국제 > 아시아/대양주 '안 의사 아리랑' 마침내 탄생, 안중근 동양평화론 현장 가다 등록 2014-07-28 07:45:00 | 수정 2016-12-28 13:07:48 【서울=뉴시스】"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 쾌거 현장이다. 【서울=뉴시스】기미양 이사(아리랑학회) = 매년 해외 ‘아리랑 루트 확정’을 위한 한민족 이주사 현장 답사를 해오고 있다. 올해는 안중근의사숭모회와 안중근의사기념관 주관으로 ‘제10기 안중근 의사 독립운동 사적지 탐방단’에 지도위원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7월 8일부터 15일까지 7박8일 동안 러시아와 중국 동북삼성의 독립운동 유적지를 탐방하고 왔다. 지난해 8월 북간도, 9월 블라디보스토크에 이어 올해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 조·중·러의 국경지대 훈춘과 동북삼성을 중심으로 하얼빈까지 안중근 의사의 행적을 따랐다. 이 중에 핵심은 러시아 지역은 블라디보스토크 우스리스크 크라스키노, 중국은 훈춘 연길 하얼빈, 대련(여순)이다.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집단거주지 신한촌과 우수리스크 최재형 정착지, 그리고 안중근 의사 의거현장인 중국 하얼빈역, 순국 장소인 뤼순 감옥은 숙연한 마음으로 답사를 했다. 모두 세계사 변혁기라는 맥락에서 수난사의 정점이고 최후를 마친 곳이라는 점에서 추모와 정신 계승이란 의무감 때문이었다. 특히 올해는 러시아 이주 150년이 되는 해이어서 더욱 뜻 깊었는데, 지난 6월18일 사단법인 고려인돕기운동본부의 초청으로 고려인 124명이 고국방문을 함께하여 러시아 150년 이주사를 되새기는 기회도 가졌다. 8월15일에는 비로비쟌에서 광복절 기념공연을 ‘아리랑’을 주제로 한다는 소식을 접하였는데, 미주 이주 100년 기념을 아리랑으로 했듯이 러시아 이주 150년 기념도 아리랑으로 하는 아리랑의 역사성을 되새기는 뜻 깊은 해임을 절감했다. ◇독립운동의 아버지, 최재형의 나라 연해주 연해주에서는 독립운동의 아버지로 불리는 최재형 선생을 고리로 안중근 의사와 13도 의군의 유인석 대장의 활동을 확인하는 곳이다. 이 곳을 인천에서 두 시간 반 만에 도착하여 밟을 수 있다는 것을 이 분들은 상상을 하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생각하니 송구스럽기도 했고, 감격스럽기도 했다. 전자는 민족 내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풍찬노숙을 각오하고 백두산을 넘어 간 경로가 아득하고 처참한 생각이 들어서고, 후자는 님들의 희생으로 만든 나라의 후손들이 단숨에 건너 백년역사를 단 며칠 만에 답사할 수 있는 세상임을 절감하기 때문이다. 연해주는 해삼위, 노령, 블라디보스토크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듯이 이주의 루트가 다양했다. 비행장에서 버스로 1시간 이동으로 다다른 신한촌(유적비)은 1863년 한인들의 이주가 시작되면서 형성되어 많은 후손을 키워 낸 곳이지만 일제와 러시아 정부에 의해 처참한 박해로 목숨을 묻은 곳이다. 그리고 드디어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정책에 의해 그 이름 ‘신한촌’으로 역사 속에 각인시켜 유적비를 남긴 곳이다. 그나마 이 유적비조차도 1999년에 3·1 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세운 것이다. 비문에 새겨져 있듯 13도 의군 창설, 1919년 망명정부(대한국민의회) 수립으로 대일항쟁의 의지를 불태운 곳이다. 지난해도 들렀던 곳이지만 1910년대 해외 독립운동 기지의 중요한 거점으로 항일역사가 응축된 역사현장인 것이다. ‘독수리전망대’에서 바라본 역사적 기억은, 조국에서 들어오는 이들과 중국에서 들어오는 한인들이 약속지점으로 삼은 뜻 깊은 곳이다. 물론 이 ‘약속’은 오늘 같은 시간 단위가 아니라 길게는 계절, 짧게는 상순·하순 정도였으니 약속 자체가 곧 기다림이었던 것이다. 이곳은 고려인들에게는 눈물과 웃음이 다 마른 이들이 뜬 눈으로 서성였던 처소였다. 해외 한인 유적지 가운데 만남의 장소로 중국 연변 일송정과 함께 매우 특별한 유적지이다. 이 독수리전망대를 내려와 혁명광장으로 이동하여 ‘혁명의불’을 찾았다. 이 기념 불꽃은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 붉은광장에도 있어 사회주의 국가의 상징이 되었는데, 나는 이번에 다른 시각으로 보기 위해 찾았다. 그것은 ‘아리랑의 불’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뉴시스】연추 하리마을-연해주에서는 1905~1908년 두만강 대안인 연추지역(크라스키노)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이 활발히 전개됐다. 지난해에 이은 10월1일 ‘아리랑의 날’을 기념하여 금년 9월 중순 쯤 태백산에서 채화하여 전국 지회로 순회하여 모시는 ‘아리랑의 불’을 준비하고 있다. 이곳의 불은 혁명의 기념물이지만 우리는 ‘아리랑의 불멸성’을 기리려는 것이다. 이 ‘혁명의 불’은 가스로써 태풍에도 꺼지지 않게 기술적 완벽성을 갖췄다는데 해군이 관리하고 있다. 기술적인 설명은 찾을 수가 없었지만 개념정도는 확인하여서 소득이 있었다. ◇라즈돌노예 역, 치르치크 아리랑 9일 전용버스로 우수리스크로 이동하던 중 라즈돌노예 역사를 들렀다. 1937년 9월의 강제이주를 증언해 주는 곳이다. 사할린 지역에 사는 동포까지 불러온 이들을 이곳 역에서 태워 출발한 이주의 현장이다. 그날의 절망과 고난의 신음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지난 번 방문에서도 생각했지만, 이곳에서부터 중앙아시아까지의 가혹한 여정을 아리랑으로 서사화한 작품을 만들어 교민들과 남북한이 함께 하는 공연을 정례화할 필요가 있음을 절감했다. 아리랑이 민족의 노래임에야 이런 역사적 현장을 보듬어야 하지 않겠는가? 지신허(한인 최초의 마을)를 경유하여 크라스키노 전망대에서 최재형, 이범윤, 안중근, 유인석 선생 등의 활동이 집약된 대표적인 연추(Ianchikhe) 마을을 보았다. 연추하(延秋河)가 흐르고 있고, 상·중·하 세 마을이 보였다. 이 마을들은 북한과 러시아 국경인 두만강과 가까워 일대 한인마을 중 가장 많은 한인들이 거주했던 곳이다. 지금은 사라진 연해주 최초의 한인마을인 지신허와 함께 대표적인 고려인 마을이다. 특히 연추는 안중근 의사가 최초로 의병을 창설하기 위해 찾은 해외 의병사의 메카이다. 의병들이 조국과 중국의 훈춘, 북간도 등을 오갈 때면 반드시 거쳤던 곳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1908년 봄 최재형, 이범윤, 이위종 등 한인 지도자들과 동의회(同議會)를 조직한 의병 본부지가 있었던 곳이니 중요한 유적지이다. 당시 많은 고려인 마을이 있었다는 곳이지만 차창 너머로 보이는 것은 러시아 극동식 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연해주 남쪽지역 최초의 한인마을 지신허를 중심으로 남북 수십리, 동서 사오리를 흐르는 지신허강 주변은 아름다운 곳이다. 상상 만으로도 고려인들이 자리를 잡을 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드디어 크라스키노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비를 마주했다. 연해주에서 버스로 4시간 넘게 달려 도착한 러시아·북한 국경지역인 추카노프카라는 마을로 두만강이 멀지 않은 민간인통제구역이다. 안중근 의사가 1909년 2월 동료 11명과 함께 왼손 무명지를 끊어 단지회(斷指會; 일명 단지동맹)를 결성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것을 맹세하며 그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 네 글자를 썼던 역사의 현장이다. 비문을 읽고 해설을 들으며 격분과 함께, 의혈의 안 의사 모습을 그리며 가슴 뿌듯함을 느꼈다. ‘역사를 뜨겁게 만나다’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비에 새겨진 글이 선연한 핏빛으로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의 직계 조상 기정진, 기우만, 기산도, 기삼연님들의 의병활동이 안 의사의 활동과 오버랩 되어 자긍심을 맛보기도 했다. 크라스키노 국경 세관에서 러시아 출국수속을 마치고 국경을 넘고 다시 장영자 세관을 거쳐 훈춘으로 들어갔다. 조·중 경계선인 도문시에서 대동강 너머 북한 산하를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곳으로 민족사의 비감을 오늘에 되짚어 보는 곳이었다. 일정을 위해 쉬지 않고 봉오동 전투 승전지를 탐방하고 다시 연길로 이동하여 항일유적지를 탐방했다. ◇코레아 우라! 【서울=뉴시스】안중근의사기념관앞에서. 안중근의사숭모회가 주최한 제10기 안중근 의사 국외독립운동 사적지 탐방단. 돈화에서 하얼빈행 기차를 탔다. 장장 8시간, 기내숙박(6인1실)으로 하얼빈 평방역에 도착했다. 먼저 찾은 곳이 731부대(죄증박물관)이다. 끔직한 생체시험과 화학실험을 자행한 일제의 잔혹상을 상징하는 곳이다. 건물도, 비치된 유물도, 모두 일그러진 고통스런 얼굴 형상으로 보이는 것은 나 만의 느낌일까? 오래 있기가 싫었다. 일제의 망령이 깊게 전해져 안 의사 유적을 찾는 걸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드디어 안중근의사기념관에 도착했다. 국내의 보도를 통해 본 것보다 위용이 느껴져 뿌듯했다. 1909년 10월26일의 장거를 기념하는 뜻 깊은 기념관이다.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기 위해 삼년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목적을 도달치 못하고 죽노니 우리 이천만 형제자매는 각자 분발하여 …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원한이 없겠노라”는 것이 안 의사의 유언이었고, 소망이었다. 이 문구는 우리 모두를 압도했다. 이 앞에서 누군들 떳떳할 수 있겠는가? 단지 마음을 다듬어 역사 만이라도 바로 보는 자세를 갖출 뿐이었다. 교과서의 흑백사진과 몇 년 전 한 방송사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기차에서 내리는 이토의 모습을 떠올랐다. 1907년 연해주에 도착한 안 의사는 단지동맹에서 맹세한대로 3년 내에 이토를 처단하리라고 다짐하고 기다렸다. 그리고 1909년 10월26일 이토가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회담을 위해 온다는 정보를 듣고 동지들과 치밀한 준비를 했다. 하얼빈역에서의 거사는 안 의사가 맡기로 했다. 드디어 운명의 순간, 예상대로 이토는 기내에서 회담을 마치고 하얼빈 총영사, 궁내대신 비서관, 만주철도주식회사 이사의 호위를 받으며 러시아 의장대를 향해 내려섰다. 순간 사열대와 환영군중의 뒤편에서 숨죽이고 있던 안 의사의 권총이 국모시해 국권침탈 국적(國賊) 이토(伊藤博文)를 향해 불을 뿜었다. 세 번의 총성이 울렸다. 이어 이토는 물론 주변의 몇 명이 함께 비틀거렸다. 총성으로 대열이 흩어지고 급기야 러시아 의장대와 호위대가 안 의사를 덮치듯 달려들었다. 이에 안 의사는 당당하게 마주하며 외쳤다.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 총성보다 더 크고 장렬하게 ‘대한만세, 대한만세’를 외친 것이다. 대한국(大韓國) 의병(義軍) 참모중장(參謀中將),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군사령관으로서의 당당한 군사활동이었다. 안 의사가 총을 쏜 장소에는 ‘삼각형’, 이토가 코코프체프 쪽으로 쓰러진 자리에는 ‘사각형’ 표시가 되어 있다. 위대한 대한국 의병대장 거사 현장이 이 두 가지 표시로만 증거하니 소중한 곳이 아닐 수 없다. 인류문명 발상지가 한 점 샘(泉)으로만 증거하듯, 위대한 동양평화 정신 발양지도 이 두 점으로만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뉴시스】하얼빈시 조선민족예술관 강월화 관장(왼쪽)에게 문경아리랑, 구동존이 아리랑, 의병 아리랑, 남은혜의 아리랑 음반을 기증했다. 강 관장은 조선민족예술관 2층 안중근 의사 기념실이 하얼빈 안중근의사기념관으로 이전하기까지 모든 책임을 맡았다. 2014년 첫 번째 아리랑로드 확정을 위한 하얼빈 지역 답사는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사상의 현장 답사였다. 이제 유네스코 아리랑 등재기념 제1호 아리랑 음반, ‘역사적 기억의 전승, 의병아리랑’ 음반을 제작하며 미진했던 중국과 러시아 지역 의병유적지 답사에 대한 숙제를 마쳤다. 그리고 완성을 미룬 ‘안 의사 아리랑’을 완성할 수 있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야 아리랑 얼쑤 아라리야 (후렴) 왜놈과는 하늘 아래 살 수가 없어 팔걷고 뛰어나와 의병되었네 동양평화 하자하자 외치는 소리 하늘땅 온세상 진동하누나 다섯발 내디뎌 도적 쓰러트리니 【서울=뉴시스】단지동맹비.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기념, 2001년 10월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설치했다. 동양평화 대역사 시작하였네 서릿발 칼날같은 저 용맹 아무르 흑룡강에 흐르고 흘러 아므르 흑룍강 흐르고 흘러 동해바다 향해 아리아리 아라리야.’ 나는 이 ‘안 의사 아리랑’으로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을 가슴에 담았다. 소란함 속에서 아리랑을 읊조린다. ‘동양평화 하자하자 외치는소리, 하늘땅 온세상 진동하누나.’ 이번 귀한 기회를 준 안중근의사숭모회와 안중근의사기념관에 감사드린다. 동시에 소중한 담론을 공유하게 해준 참여자 모든 분들에게 감사한다. kibada@naver.com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쇄하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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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아리랑축전북한의 아리랑축전 admin 0 4,768 2013.05.08 10:28 북한에서는 4월 말부터 ‘아리랑축전’이 열린다. 북한은 이 행사를 위해 많은 공을 들이고 있으며 외국인을 관광객으로 유치한다고 한다. 남측 정부가 허락만 한다면 남한 사람들도 구경갈 수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부시의 ‘악의 축’ 발언과 방한 이후 북미관계가 더 악화되고 남북관계도 여전히 답보상태에 머물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이 세계를 향해 ‘혁명의 성도(聖都)’라는 평양의 문을 활짝 열고 아리랑 관광객을 유치하는 것은 그 자체로 커다란 변화와 의미가 아닐 수 없다. 올 상반기 한반도 정세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아리랑축전’에 대해 살펴보자. '아리랑축전'의 주요 행사'아리랑축전' 때 공연할 작품의 공식 명칭은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이다. 여기서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을 남한식으로 표현하자면 꼭 같지는 않지만 대집단체조란 매스게임을, 예술공연이란 카드섹션을 연상하면 된다. 이 행사를 기획할 당시인 2001년 4월15일에는 창작가들이 행사명을 '첫 태양의 노래'로 계획했다고 한다. 그런데 평양 윤이상 음악연구소 부소장이자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공연기획자인 리철우씨에 의하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아리랑으로 하자"고 제안해 현재의 형태로 바뀌게 되었다. 북한에서 김일성 주석을 상징하는 '태양'이란 말이 정치적 색채가 농후하기 때문에 민족적 색채가 짙은 '아리랑'으로 바꾸었고 따라서 내용도 여기에 맞추고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아리랑축전'의 행사기간은 2002년 4월29일부터 6월29일까지 2개월 동안이고, 일요일은 제외하고 주6회 공연을 한다. 이 기간은 故김일성 주석의 생일(태양절)인 4월15일에서 2주 후에 시작되어 6·15 남북공동선언 2주년을 거쳐 남한의 월드컵대회 기간(5.31∼6.30)과 약 1개월 정도 겹친다.장소는 평양을 흐르는 대동강의 능라도 '5월1일 경기장'이다. 현재 옥외 경기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1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1985년 건설한 것이다. 지난 2000년 10월 노동당 창건 55돌 행사도 이곳에서 치러졌다.입장료는 외국인의 경우 특등석 300달러, 1등석 150달러, 2등석 100달러, 3등석 50달러로 책정해 놓고 있다. 북한관광 요금은 일본 관광객의 경우 3박4일 코스가 최저 17만2천엔(약172만원), 4박5일 코스가 최고 19만3천엔(193만원)으로 알려졌으며, 중국 조선족 동포의 경우 중국의 한 여행사(遼寧省 中國靑年旅行社)에 의하면 중국 심양(沈陽)에서 항공편으로 평양과 개성을 3박4일 여행할 경우 '아리랑' 관람 비용 미화 30달러 외에 3천위앤을 받고 있으며 역시 항공편으로 평양과 개성, 묘향산 등을 4박5일간 둘러볼 경우에는 3천500위앤을 받는다고 한다.보다 자세한 내용이나 새로운 업데이트를 보려면 중국 베이징(北京)에 본부를 두고 있는 북한의 범태평양조선민족경제개발촉진협회(범태)가 운영하는 인터넷 홈페이지인 '조선인포뱅크'에서 서비스하는 한글 '아리랑 특별사이트'(http://www.arirang.dprkorea.com)를 참고하면 된다.평양에서의 일정과 다양한 관광코스중국 베이징을 통한 입북 방식에 따른 3박4일부터 6박7일까지 평양 중심의 모델 관광코스 10개가 제시되어 있다. 북한의 관광총국은 일본에서 운영하는 인터넷 홈페이지 '조선관광'(http://www.dprknta.com)을 통해 3박4일관광코스로 평양-개성, 4박5일 관광코스로 △평양-묘향산-개성, △평양-개성-함흥, △평양-백두산-혜산 등을 소개했다. 또 5박6일 코스로 △평양-개성-장수산-해주-사리원, △평양-칠보산-청진-회령-왕재산, △평양-백두산-개성, △평양-원산-개성, △평양-칠보산-개성 등 5개 관광상품과 최장 6박7일 코스로 평양-남포-구월산-개성을 제시했다. 이들 관광코스 가운데 일부는 북한 국내의 전세 비행기 이용이 가능하며, 특히 5박6일 상품인 평양-칠보산-청진-회령-왕재산 코스는 함북 남양의 남양교를 걸어서 중국 투먼(圖們)으로 되돌아가는 코스다.또한 평양 음식점들의 '특색있는 음식'들이 아리랑축전 기간 중 외국 관광객들에게도 그대로 제공될 것으로 보여 흥미를 모으고 있다. 각 음식점들의 특별메뉴로는 옥류관(고기쟁반국수와 평양냉면), 평양수산물백화점 및 류경농마국수집(회냉면), 청류관(국수, 신선로, 전골), 평양메기탕집(메기탕), 평양단고기국집(보신탕 및 요리), 칠성각 및 평천각(소내장탕), 모란식당(꿀떡, 떡국), 압록각(자장면-밀가루면이 아닌 메밀면 사용), 신흥관(감자농마국수), 옥계각(해주교반), 경암각(떡국, 잣죽), 강계면옥(수수경단) 등이 있다.또한 '아리랑'을 관람하는 외국 관광객들은 희망에 따라 평양의 명소를 비롯한 북한 각지를 관광할 수 있게 될 것으로 보인다. 즉 평양에 오는 관광객들은 주체사상탑, 개선문, 당창건 기념탑, 단군릉, 동명왕릉을 비롯해 세계 각국에서 보내 온 진기한 선물들이 전시된 국제친선전람관 등을 관람할 수 있게 될 것으로 알려졌다. 더 나아가 북한 가극예술의 최고봉인 '피바다'와 국제교예축전에서 최우수 작품으로 찬양받은 공중교예 '날아다니는 처녀들'을 비롯해 평양교예단 공연, 평양시 학생소년들의 예술공연, 민족가극 '춘향전' 등도 관람할 수 있을 것으로 알려졌다.북한예술의 총화'아리랑'이라는 명칭과 그 내용에서도 짐작되듯 민족적 색채가 강하면서,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통해 남한에는 동족의식을 세계를 향해서는 평화적 연대를 추구할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보(2002.1.1, '희망찬 새해 2002년 세상을 들썩하게 놀래울 아리랑')는 "동방조선이 어떻게 파란 많은 수난의 력사를 거쳐 자기운명의 주인이 되었으며 오늘을 어떻게 존엄 있는 민족으로 출현하게 되었는가를 '아리랑' 노래에서 생활적이면서도 생동한 예술적 장면들로 서사적으로 펼쳐 보이려 한다"고 밝혔으며, 조선신보는 "아리랑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세계를 향한 메시지일 것"이라면서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 거듭되는 외세의 침략과 압력을 물리치고 평화와 친선을 도모하는 나라의 이미지를 부각시킬 아리랑은 세계를 향한 평화의 메시지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연합뉴스에 의하면 북한 월간잡지 '금수강산'(2001.12)이 아리랑에 대해 "조선의 명곡들과 민족무용, 예술체조와 교예, 황홀한 배경미술, 현대적인 장치물과 조명수단을 총 동원하여 진행하는 종합예술작품"이라면서 "작품은 모두 4개의 장과 서장, 종장, 그리고 10여 개의 경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밝혔다고 한다. 잡지는 이어 북한의 유명한 국제, 국내 콩쿠르 수상자들을 비롯한 예술인들과 재능 있는 청년학생, 어린이 10여만 명이 참가하는 이 작품은 "민족의 얼이 살아 숨쉬는 명곡들로 음악구성이 되어 있고 민족적 색채가 짙은 무용들과 기교 높은 체조로 충만되어 있으며 전설 속의 선남선녀가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리는 금수강산의 절경을 황홀하게 펼쳐 보이는 장면들이 있어 한번 보고 나면 또 보고 싶은 충동을 금할 수 없게 한다"고 강조했다는 것이다.북한식 '주체예술의 총화'라는 '아리랑'의 총연출은 지난 2000년 노동당 창건 55돌 행사를 연출해 공화국 영웅칭호를 받은 인민예술가 김수조(70) '피바다가극단' 총장이 맡았다. 그는 '아리랑'이 다른 대공연과는 다르다며 이번에는 민족의 얼이 깃든 명곡들, 민족적 색채가 짙은 우아하고 화려한 무용들, 기교 높은 체조와 교예로 꾸며진다고 했다.이와 같은 내용에다가 여러 수단과 장치를 더하여 호화롭게 한다고 하는데, 그가 제시한 수단과 장치는 인민의 기상과 기백을 담은 체조, 금강산의 선남선녀들의 춤을 담은 무용 율동, 기교 있는 배우들이 펼치는 공중 교예, 황홀한 배경의 미술, 만화천변의 배경대(90여 개 장면의 그림), 특대형 영사화면, 현대적인 레이저 조명장치 등이다.'아리랑'을 좀더 쉽게 이해하려면 지난 2000년 10월 평양을 방문했던 미국의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관람한 '백전백승 조선노동당'을 상기하면 된다. 당시 우리나라 TV에서도 잠깐 그림이 나온 적이 있는데, 능라도 '5월1일 경기장'에서 10만 명의 출연진이 스탠드 배경대에 글자를 써 보이고 집단체조로 미사일(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는 장면을 내 보이자 올브라이트가 기겁을 하며 박수를 치던 모습이었다.한반도에는 평화를 민족에게는 통일을그렇다면 북한은 '아리랑축전'을 어떤 의도와 목적에서 기획했을까. 먼저 북한은 이른바 '60∼90∼70'을 경축하고 이를 통해 체제의 우월성(단순히 체제유지가 아닌)을 대내외에 과시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60회 생일(2.16), 고 김일성 주석의 90회 생일(4.15), 인민군 창건 70주년(4.25) 등 내부 3대행사를 마무리짓고 이어서 그 열기를 바탕으로 국제사회를 향해 무언가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이다.둘째, 관광객 유치를 통한 외화획득이다. 북한은 '아리랑축전'을 성공적으로 치르고 또 외국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전례 없는 조치들을 취하고 있다. 모든 관광길의 개방, 비자 발급의 완화 및 현지 발급, 모든 편의 제공, 아리랑축전과 연계된 북한 각 지역에 대한 관광, 호텔의 재정비, 신변안전보장, EU(유럽연합) 등을 향한 다양한 관광외교, 그리고 특히 남한에 대해서는 인천-평양간 직항공로 개설이나 금강산-원산-평양으로의 육로관광 개방 등이 그것이다.셋째, 서방세계에 평양을 개방해서 외국인은 물론 남한사람들에게까지 초청의사를 밝힘으로써, 국제적으로는 평화의 메시지를 그리고 남한에는 '민족'과 '민족주의'에 입각해 민족동질성을 확인하자는 것이다. 즉 한반도에는 평화를, 민족에게는 통일이라는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북한의 '아리랑축전'에 대해 남한 일부에서 '파시즘적 예술'이니 '월드컵의 맞불'이니 하는데 이는 전혀 근거가 없을 뿐더러 의도적인 왜곡에 가깝다. 6·15공동선언의 정신은 남북이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고 또 하는 일을 존중하자는 것이다. 북한에서 '아리랑축전'을 하든 '쓰리랑축전'을 하든 그건 북한의 고유 사업이고 남한에서는 이를 존중해야지 사시로 볼 필요가 없다. 6·15공동선언의 정신에 맞게 '아리랑축전'을 보면 되는 것이다.첫째, 북한은 '아리랑'을 전세계인 뿐만 아니라 남한 사람들에게도 구경올 것을 권유하고 있다. "남조선 동포 여러분은 아리랑을 볼 기회를 놓치면 일생을 두고 후회할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고유 정서는 옆집에서 잔치를 하면 찾아가서 축하해 주는 것이다. 특히 요즘처럼 남북관계가 답보인 상태에서는 '아리랑'을 구경가는 것이 단순한 '관광객'이 아니라 남북교류와 대화의 물꼬를 트는 '통일의 전령'일 수 있다. 게다가 북한이 평양의 문을 활짝 연 것 자체가 외부세계에 대한 개방이다. 북한더러 개방하라고 말만하고 정작 북한이 개방을 했는데 이를 거부한다면 이는 자가당착이다. 북한의 개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리랑을 구경가자.둘째, 가능한 아리랑축전과 월드컵대회를 연계시키지 않아야 한다. 예컨대 양 행사를 남북이 교차관광하자는 견해가 있는데 이는 그럴 듯하지만 자칫 상호주의의 변종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다. 물론 서로가 왔다갔다하면서 월드컵도 구경하고 아리랑도 구경하면 좋은데, 역대적으로 봐서 남북이 서로 무슨 조건을 달거나 상호주의를 내세워서 잘된 적이 별로 없다. 물론 두 행사는 모두 잘 되어야 한다. 두 행사가 잘되기 위해서는 아무런 전제조건 없이 먼저 열리는 아리랑축전에 남한에서 구경가면 된다. 월드컵은, 북한에서 월드컵을 축하해 주러 올 것인가 아닌가는 북한에 맡기면 된다. 물론 그 역의 경우가 되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6·15공동선언에서 남북이 합의한 정신이고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 주는 것이다. 제작년도 : 통권 : 제 63호 프린트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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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중국, '아리랑 중국 문화재 만들기' 노골화인쇄하기취소 중국, '아리랑 중국 문화재 만들기' 노골화 기사입력 2012-12-06 06:11 최종수정 2012-12-06 09:25 중국, '아리랑 중국 문화재 만들기' 노골화 (서울=연합뉴스) 진성철 기자 = 작년 10월 중국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발간된 같은 제목의 책 '연변무형문화유산화첩(연변주 문화국 편)'에 실린 서로 다른 아리랑 내용. 책 마지막 페이지에 발간 일자가 2011년 10월로 동일하게 찍혀 있지만 한 책에는 아리랑이 성급(省級) 무형문화유산 '아리랑타령'(阿里郞打令)으로, 또 다른 책에는 국가급 무형문화유산 '아리랑'(阿里郞)으로 표기돼 있다. 지난해 중국 당국이 아리랑을 자국의 국가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뒤 책 내용이 수정된 것으로 추정된다. << 문화부 기사 참조 >> 2012.12.6 photo@yna.co.kr "아리랑,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해야"(서울=연합뉴스) 황윤정 서혜림 기자 = "아리랑은 조선민족의 이주와 생활 속에서 류전(유전)되여 내려오며 불리운 중국 조선족들 속에서 널리 전해내려온 가장 대표적인 민요이다. 아리랑은 '아리랑'을 중복해서 부르는 것이 특징인데 선률(선율)이 류창(유창)하고 부드러우면서도 평온하며 아름다운 특성을 지니고 있는바 중국 조선족들 속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작년 10월 중국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발간된 '연변무형문화유산화첩(연변주 문화국 편)'에 실린 내용이다.지난해 아리랑을 자국의 국가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중국의 '아리랑 중국 문화재 만들기' 움직임이 노골화하고 있다. 조선족을 소개하는 책자에 아리랑 관련 내용을 대거 수록하는 등 아리랑을 중국 문화재로 만들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연변무형문화유산화첩'도 그 내용이 수정돼 재발간됐다. 아리랑이 중국 국가무형문화유산이라고? (서울=연합뉴스) 진성철 기자 = 작년 10월 중국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발간된 같은 제목의 책 '연변무형문화유산화첩(연변주 문화국 편)'. 왼쪽 책에는 아리랑이 성급(省級) 무형문화유산 '아리랑타령'(阿里郞打令)으로, 오른쪽 또 다른 책에는 국가급 무형문화유산 '아리랑'(阿里郞)으로 표기돼 있다. 지난해 중국 당국이 아리랑을 자국의 국가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뒤 책 내용이 수정된 것으로 추정된다. << 문화부 기사 참조 >> 2012.12.6 photo@yna.co.kr 기미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사무총장은 최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발간 일자가 동일한 두 가지 종류의 '연변무형문화유산화첩'을 입수했다면서 아리랑 관련 내용이 수정돼 있었다고 말했다.책 마지막 페이지에 발간 일자가 2011년 10월로 동일하게 찍혀 있지만 한 책에는 아리랑이 성급(省級) 무형문화유산 '아리랑타령'(阿里郞打令)으로, 또 다른 책에는 국가급 무형문화유산 '아리랑'(阿里郞)으로 표기돼 있다.책 내용도 다르다. 아리랑을 성급 무형문화유산으로 표기한 책은 아리랑을 단순히 "중국 조선족의 대표적인 민가"라고 소개한 반면 아리랑을 국가급 무형문화유산으로 기재한 또 다른 책은 "중국 조선족들 속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했다.기 사무총장은 "책 제목은 물론 내용이 다 똑같은 데 아리랑 부분만 다르다"면서 작년 10월 1일에 책을 출간한 뒤 아리랑 내용을 수정해 재발간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기 사무총장은 "진도아리랑타령, 밀양아리랑타령 등 (조선족이 부르는) '아리랑타령'과 (우리가 흔히 아는) '본조(本調) 아리랑'을 모두 선점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두 종류의 책자를 발간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그는 아리랑 곡이 수록된 '청년학생가곡집'(1955년 연변교육출판사 발간)도 입수했다면서 "해방 이후 나온 책 가운데 아리랑이 수록된 가장 최초의 책"이라면서 "조선족들은 해방 후 아리랑을 민족 표상으로 여겼다"고 소개했다. '조선족'에 실린 아리랑 (서울=연합뉴스) 진성철 기자 = 중국 랴오닝(遼寧)민족출판사에서 올해 4월 18일 재발간한 조선족 소개 책자 '조선족'에 실린 아리랑. << 문화부 기사 참조 >> 2012.12.6 photo@yna.co.kr 중국 랴오닝(遼寧)민족출판사에서 펴낸 조선족 소개 책자 '조선족'에도 아리랑 내용이 새로 수록됐다.2009년 1월 1일 발간된 '조선족'에는 아리랑 내용이 없었지만 올해 4월 18일 재발간된 책에는 책 서문에서부터 아리랑을 소개하고 있다. 또 별도의 지면을 할애해 아리랑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기 사무총장은 "중국이 아리랑을 자국의 무형문화유산으로 체계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면서 "정작 국내에서는 아리랑이 '너무 흔하다'는 이유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돼 있지 않은데 한시바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그는 "아리랑이 이번에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마냥 즐거워할 수 없다"면서 고구려 고분군처럼 중국이 북한과 손잡고 아리랑의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공동 등재를 추진할 가능성도 있다고 우려를 나타냈다.중국은 2004년 북한과 공동으로 각각 보유하고 있는 고구려 고분 유적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했다.yunzhen@yna.co.kr 조선족 소개 책자 '조선족' (서울=연합뉴스) 진성철 기자 = 중국 랴오닝(遼寧)민족출판사에서 올해 4월 18일 재발간한 조선족 소개 책자 '조선족'. 책 서문은 물론 별도의 지면을 할애해 아리랑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 문화부 기사 참조 >> 2012.12.6 photo@yna.co.kr hrseo@yna.co.kr 이 기사 주소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etc&oid=001&aid=0005973893 인쇄하기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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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아리랑' 유네스코 등재 남한 단독 신청'아리랑' 유네스코 등재 남한 단독 신청 기사입력2012.06.17 13:13 최종수정2012.06.17 13:24 [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정선아리랑을 포함한 아리랑의 유네스코 등재 신청이 북한을 제외하고 남한 단독으로 진행됐다.문화재청은 지난 2009년 유네스코에 인류무형유산으로 신청한 '정선 아리랑'을 국내 각 지역에 분포한 아리랑으로 확대해 등재해달라고 지난 6일 신청서를 냈다. 아리랑은 지역별로 50여종, 음악은 60여종이 넘는다.지난해 6월 중국은 연변 조선족 자치구의 아리랑과 가야금, 회혼례, 판소리, 씨름 등을 국가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 발표하면서 논란이 된 바 있다. 뒤늦게 우리 정부는 각 지역에 분포한 아리랑들을 모두 포함해 유네스코 등재를 추진하기에 나선 것이다. 추가로 신청된 아리랑은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 등이다.지난해 말 최광식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북한과 함께 아리랑을 유네스코에 공동 등재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이번 신청에는 북한이 빠진 채 남한만 단독으로 진행됐다.문화재청 관계자는 "남북관계 경색이 개선된 후 북한과 협의해 북한아리랑을 포함시킬 계획"이라면서 "일단 국내 아리랑들을 확대해 등재를 신청한 것"이라고 설명했다.이어 이 관계자는 "북한 아리랑과 공동 등재신청은 북 정권에서 아리랑을 선전, 선동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어 이에대한 충분한 검토도 필요한 과정"이라고 덧붙였다.아리랑의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 등재는 오는 11월 스페인 그라나다에서 열리는 제7차 무형유산위원회에서 결정될 예정이다.한편 시민단체들은 아리랑 유네스코 등재신청에 북한도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기미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사무총장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북한과 공조해 아리랑을 유네스코에 등재 신청해야한다"면서 "아직도 정선아리랑만 국내 무형문화재로 등재돼 있는 상황도 극복해야 할 사안"이라고 강조했다.오진희 기자 val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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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우크라이나 고려인 축제 '까레야다 2009'우크라이나 고려인 축제 '까레야다 2009' 우크라이나 남부 헤르손(ХЕРСОН) 23일~25일 09.10.26 10:28l최종 업데이트 09.10.26 19:21l 김형효(tiger3029) ▲ 까레야다 2009년(КОРЕЯДА 2009ГОД) 고려인 축제를 알리는 리플렛이다. 까레야다는 민족 문화 행사라는 뜻이다. © 김형효 우크라이나에 살고 있는 우크라이나 동포들의 축제인 까레야다 2009년(КОРЕЯДА 2009ГОД)행사가 성대하게 열렸다. 지난 주말인 23일~25일 우크라이나 남부 헤르손(ХЕРСОН)에서 열린 이번 행사는 우크라이나 고려인 협회(회장 키예프외국어대 한국어과 교수 강정식) 주최로 헤르손에서 열렸다. ▲ 고려인 회장 인사말 고려인 협회장이신 강정식 키예프 외국어대 한국어과 교수님의 개회사와 개회선언으로 행사가 시작되었다. © 김형효 ▲ 박노벽 주우크라이나 대사님 축사 축사 중인 주우크라이나 박노벽 대사님! © 김형효 23일 고려인 참석자들은 각지에서 헤르손 인근의 고라 쁘리스탄(ГОЛА ПРИСТАНБ, 인구 1만의 작은 도시) 사나톨리(휴양소)에 모여들었다. 필자도 예빠토리야에서 이번 행사에 참석하는 고려인의 승용차에 함께 타고 출발하여 오후 1시에 도착하였다. 현장에서는 고려인 젊은 여성들이 행사 참석자들을 친절히 안내해주었다. 그들도 각 지역의 젊은 일꾼들이었다. 먼저 도착한 인사들과 인사를 나누며 식당으로 향했다. 점심을 함께 한 오후 3시에 모든 참석자들이 고라 쁘리스탄의 중심지를 견학하였는데 도시라고 하기에는 정말 작은 지방이었다. 도시를 알리는 박물관이 있고 근교에는 넓은 강이 흘렀다.다음 날인 토요일 24일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대회 리허설을 위해 행사가 열리는 헤르손으로 먼저 출발하고 무대에 오르지 않는 사람들은 사나톨리에서 휴식을 취했다.토요일 오후 5시 이번 행사를 주최한 고려인협회 회장인 강정식 교수의 개회사로 축제가 시작되었다. 이번 행사를 축하하기 위해서 수도 키예프에서 주우크라이나 박노벽 대사님이 참석하여 축사를 하고, 이어서 현지의 우크라이나 관계 기관장들의 축사가 이어졌다. 거의 모든 축사나 안내 방송, 사회는 러시아어로 진행돼, 고려인 행사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였다. 우크라이나의 국가가 연주되었고 곧이어 애국가가 들려오면서 비로소 고려인 행사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 우크라이나 전통 공연 개회사가 시작되기 전 개막을 알리는 오픈 공연은 우크라이나 공연단의 찬조 무대로 장식되었다. © 김형효 까레야다(КОРЕЯДА)는 우크라이나 고려인 사회에서는 설날 축제와 함께 가장 성대한 행사라고 한다. 이번 가을에 열리는 축제 까레야다(КОРЕЯДА)는 문화 예술 행사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였다. 우크라이나에 살고 있는 동포들은 거의 모든 지역에서 참석한다고 할 정도로 대표성이 있는 행사였다. 실제로 참석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우크라이나 동서남북 각 지역을 대표하는 고려인들이 참여하여 기예를 자랑하는 축제였다. ▲ 화관무 공연 화려하고 기품있는 화관무 공연 장면~! 숨죽이면 공연을 관람하던 도중 환성이 터진 것은 현지 우크라이나인들이 모여 앉은 객석에서였다. 키예프 지역 고려인 © 김형효 ▲ 키예프 부채춤 어린 아이들이 꽃처럼 피어났다. 부채춤의 화려함을 바라보며 보내주는 탄성과 박수소리도 장내를 수놓았다. © 김형효 공연의 개막은 우크라이나 현지인들의 공연으로 시작되었으나 곧 한복의 아름다움과 함께 전통 춤사위들이 무대를 압도했다. 간간히 어린 아이들이 부르는 현대가요를 들을 수 있었다. 필자는 고려인들의 노래와 춤에 탄성과 경탄을 멈출 수 없었다. 특히 장꼬이에서 왔다는 11세 여자어린이의 <여자이니까>란 노래를 들으면서는 전율이 느껴질 정도였다. 노래를 잘하는 정도가 아니라 기성 가수보다도 뛰어난 감성까지 전해지는 느낌이었는데 우리말도 꽤 잘 할 것처럼 느껴졌다. 부채춤과 화관무, 도라지, 사물놀이 등이 계속 이어졌다. 사실 사물놀이가 공연되어 리드미컬하고 박력 있는 공연을 기대했으나 아직은 세기가 없는 느낌이었다. 저들이 사물놀이의 흥을 몸에 담는다면, 그럴 수 있다면 우크라이나 고려인 사회에 신명이 실려서 고려인들의 삶에도 더욱 활기 있는 삶이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이번 행사의 대미를 장식한 것은 국기 태권도 시범이었다. 특히 남자 불량배를 물리치는 여성의 호신술을 보는 방청객들은 커다란 환호성을 지으면서 웃음을 지었다. 태권도 시범단은 코이카 사범 두 사람과 우크라이나 태권도 수련생 여섯 명의 합동 시범으로 이루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은 몰라도 태권도를 알 정도로 우크라이나에서도 국기 태권도는 알아주는 운동 경기다. ▲ 또 다른 부채춤 아름답고 화려하다. 새롭게 각색된 부채춤이었다. 필자는 여러 차례 부채춤을 보았지만, 이 무대의 공연은 생소했다. © 김형효 서로 낯모르는 얼굴들이지만, 먼저 보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인사를 건넸다. 그것은 그들 모두의 모습이었고 인사가 끝난 후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질문이 이어졌다. 삶이 어느 곳에서 어느 누구에게라도 그런 모습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세상에는 분쟁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이란 생각도 한다.이번 행사에는 필자가 한글을 가르치고 있는 예빠토리야의 한글학교 두 어린이도 노래와 춤 공연을 펼쳤다. 필자는 또 한 번 그들의 공연을 보면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한마디 한국어도 하지 못하던 그들이 어느 틈에 그런 춤과 노래를 배웠는지 알 수가 없다. 아무튼 동족의 피에 동족의 문화, 그 모든 것들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한국에서 가까이 중국 동포들의 공연을 보면서도 놀라웠지만, 이곳 우크라이나 대부분 지역은, 한국에서는 동포들이 살고 있는 줄도 모르는 그런 곳들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우리의 말과 글을 익히고 배우는 것은 물론 우리의 생활양식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살아가고 있는 동포들이 많다. ▲ 객석의 고려인 할머니들 지팡이 짚고 넘어온 세월처럼 고단했던 날을 회상이라도 하듯 생각이 깊은 얼굴들이다. 무슨 사색이 저리 주름진 얼굴의 할머니들을 생각에 잠기게 하는가? © 김형효 필자는 대회가 끝난 25일 아침 70세를 넘긴 할머니를 만났다. 필자가 기거하는 방 앞 벤치에서 불편한 다리를 쉬어가는 길이었는데 그때 인사를 주고 받았다. 잠시 후 그분의 딸인 김류드밀라라는 분이 합석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된장과 고추장을 다 만들어드신다고 해서 한글도 배우고 쓰시는지 여쭈었다. 필자는 그런 와중에 놀라운 말을 들었다. 도네츠크 인근에도 수많은 고려인들이 살고 있는데 1000여 명은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글 선생이 없어서 가르쳐줄 사람이 없다고 했다.안타까운 소식에 장담할 수는 없지만,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한 번 찾아가서 몇 주일이라도 한글을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으로 그분들의 연락처를 받아두었다. 방학기간을 이용해서 그곳에 찾아가 한글 자음과 모음 그리고 간단한 인사와 예절이라도 가르쳐주고 싶다. 필자는 요즘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죄를 짓는 것과 같다"라는 글귀를 써두고 되뇌인다. ▲ 김타냐의 노래공연 예빠토리야 한글학교 김타냐의 노래 솜씨 자랑. © 김형효 이번 행사에 참여한 고려인들은 헤르손에서 1000km가 넘는 도네츠크, 그 인근의 옛 수도 하리코프, 현 수도 키예프, 우크라이나 남부의 니꼴라예프, 예빠토리야, 장꼬이, 심페로폴, 헤르손 등 고려인이 거주하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참여했고 그들의 춤과 노래는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더구나 그들에게 주어진 조건의 열악함을 생각하면 그 모습이 더욱 더 자랑스러웠다. 여성들의 부채춤이나 화관무는 그 화려함에 우크라이나 방청객들도 경탄을 자아내며 힘찬 박수를 보내주었다. ▲ 김하늘꽃의 춤공연 김하늘꽃은 어머니가 고려인이다. 혼혈이지만, 한국문화에 관심이 많은 그가 언제 춤을 배웠는지 필자는 알지 못했다. 공연이 끝난 후 다른 출연진의 옷을 빌려 입은 때문에 모든 출연진이 무대에 올라 인사하는 순간 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어서 안타까웠다. © 김형효 필자는 이번 행사 후 인근의 가까운 문화유적지들을 둘러볼 생각이었으나 행사 소식을 빨리 전하고 싶어 후일로 여행을 미루고 일행과 함께 예빠토리야로 발길을 돌렸다. 원래는 이곳에서 다섯 시간이 소요되는 먼거리 인근의 도시를 둘러볼 생각이었다. 그 중 한 곳이 오데사다. 하지만 아쉽게도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했다. 고국에 계신 많은 분들이 우크라이나 사회 극소수 민족인 고려인들에게도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져주시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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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67년만에 고국에 돌아온 김산의 영혼>아버지 김산의 훈장증을 보여주는 고영광씨 고영광씨, 아버지 명예회복 과정 소개(서울=연합뉴스) 김용래 기자 = "아버지 김산의 영혼이 고국에 돌아왔다. 한번도 아버지를 아버지라 불러본 적이 없지만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은 한결같다."17일 오전 종로구 공평동 태화빌딩의 지하회의실에서는 광복60주년을 맞아 얼마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 독립운동가 김산(1905∼1938. 본명 장지락)의 유일한 혈육인 고영광(高永光.69) 씨를 초청해 김산의 복권의미와 생애를 돌아보는 자리가 마련됐다.이날 자리는 인터넷에 김산을 기리는 사이트 아리랑나라(www.arirangnara.com)를 운영하는 기미양(45) 씨가 고씨를 초청해 이뤄졌다.고씨는 이날 자신의 아버지의 생애를 다룬 '아리랑'에 나오는 그 가사 그대로 국악인들이 부르는 아리랑 곡조를 들으며 감회에 젖는 듯했다.올해는 조선의 독립운동가 김산이 태어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미국의 여류작가 님 웨일즈가 쓴 김산에 대한 평전 '아리랑'(원제: Song of Ariran)'의 개정판이 최근 출간되고, 그동안 사회주의 계열로 분류돼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던 김산에게 정부가 최근 건국훈장을 추서하는 등 그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고씨는 미리 준비한 아버지 김산의 자세한 활동을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아버지의 독립운동과 생전 활동들을 매우 자랑스러워하는 아들의 모습이었다. 다시 한번 김산의 독립운동 활동을 인정한 한국 정부에 대한 감사의 말도 잊지 않았다.일본 스파이로 몰려 1938년 중국에서 33세의 젊은 나이로 총살된 혁명가 김산.그의 아들 고영광 씨는 김산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얘기를 나이 서른이 넘어 처음 들은 후, 1970년대 후반 당시 중국 공산당 중앙 조직부장이었던 후야오방(胡耀邦)에게 직접 편지를 써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해 달라고 탄원했다.당시 그는 아버지 김산을 만났던 사람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만나고 "당신의 아버지는 진정으로 멋진 혁명가였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술회했다.결국 1983년 1월, 후야오방과 김산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일본의 스파이로 몰려 처형된 김산은 명예를 회복하게 된다.김산의 유품은 없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고씨는 남아 있는 유품은 사진 한 장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말했다.이날 질문 중에는 "님 웨일즈와 아버지가 연인 관계였다고 생각하지 않느냐"는 것도 있었다. 고씨는 이에 대해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문제"라고 말한 뒤 "일반적인 동지 관계보다는 가까웠을 수 있겠지만, 상상하기 나름"이라며 님 웨일즈는 조선의 해방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고 덧붙였다.한편 이날 '아리랑'을 감명깊게 읽었다는 연극인 김경원 씨는 김산의 이야기를 소재로 직접 쓴 희곡을 준비해오기도 했다. 그는 앞으로 남과 북이 함께 김산의 생애 다룬 연극을 만들어 볼 생각이라고 밝혔다.또 주최측이 남녀 국악인을 초청, 님 웨일스와 김산의 '아리랑'에 나오는 '아리랑 옥중가'와 '아리랑 연가'를 직접 들어보는 자리도 마련됐다. '아리랑 연가'는 당시 중국에서 님 웨일즈와 김산이 영어가사로 함께 불렀던 노래.고씨를 한국에 초청해 이날 자리를 마련한 기미양 씨는 "흔히 '아리랑'이 님 웨일즈의 단독 저작으로 알려졌는데 '아리랑' 영문 초판본에는 분명히 저자가 '김산ㆍ님 웨일즈'라고 써 있다"며 "김산은 '아리랑'의 주인공이자 동시에 공동 저자"라고 강조했다.yongla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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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광복절 , 독립운동가 김산 서훈 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