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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아리랑, 월간영웅 주목…기미양 작 '아무르 아리랑'인쇄하기 닫기 문화 > 문화일반 안중근 아리랑, 월간영웅 주목…기미양 작 '아무르 아리랑' 등록 2015-10-29 10:47:35 | 수정 2016-12-28 15:49:19 【서울=뉴시스】왼쪽부터 기미양 아리랑학회 연구이사, 안중근 의사의 증손자 토니 안, 유명옥 서울아리랑보존회 회장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기미양 아리랑학회 연구이사가 만든 '아무르 아리랑'이 월간 '영웅'이 창간 기념으로 진행한 '안중근 문학작품 공모'전에서 특별상을 받았다. '아무르 아리랑'의 아무르는 러시아 시베리아 남동부에서 발원해 중국 둥베이 국경 등을 따라 흐르는 아무르 강을 가리킨다. 안중근 의사가 190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 아무르 강을 건너 단지동맹을 맺었다. 월간 '영웅'을 발행하는 도서출판 '꼬레아 우라'는 아무르강 4000㎞의 유장함과 안 의사의 깊은 한을 민족어 아리랑에 반영한 '아무르 아리랑'을 높게 평가했다. 이 아리랑은 윤은화(양금연주자)가 편곡하고, 유명옥(서울아리랑보존회 회장)이 창을 맡아 음반으로 제작할 예정이다. 월간 '영웅'은 '안중근 의사의 뜻과 사상을 되살려 통일 대한민국과 세계 평화의 길잡이로 삼겠다'는 취지로 창간됐다. 안중근의거 106돌 기념일인 지난 26일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월간 '영웅' 창간 기념식을 열었다. 【서울=뉴시스】'아무르 아리랑' 이날 배포된 창간호는 안 의사 증손자 안도용씨의 글, 3대에 걸쳐 안 의사에 대한 사랑을 실천해 온 윤자성 미국 안의사기념사업회 회장 인터뷰, 김월배 중국 다롄(大連)외국어대 교수의 논문 등으로 채워졌다. 월간지 제호 공모전에는 초등학생부터 80대까지, 남녀노소가 참여해 232편이 응모됐다. 발행인은 박창재 에픽소프트 대표다. 2013년 안중근의사숭모회가 주관하는 '안중근 아카데미' 강의(15주)를 수강한 뒤 사비를 털어 잡지를 창간했다. realpaper7@newsis.com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https://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51029_0010380102&cID=10701&pID=10700#인쇄하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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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안중근 아리랑, 월간영웅 주목…기미양 작 '아무르 아리랑' (2015.10.29)안중근 아리랑, 월간영웅 주목…기미양 작 '아무르 아리랑' 기사입력 2015.10.29. 오전 10:47 기사원문 스크랩 본문듣기 설정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2 댓글 요약봇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서울=뉴시스】왼쪽부터 기미양 아리랑학회 연구이사, 안중근 의사의 증손자 토니 안, 유명옥 서울아리랑보존회 회장【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기미양 아리랑학회 연구이사가 만든 '아무르 아리랑'이 월간 '영웅'이 창간 기념으로 진행한 '안중근 문학작품 공모'전에서 특별상을 받았다.'아무르 아리랑'의 아무르는 러시아 시베리아 남동부에서 발원해 중국 둥베이 국경 등을 따라 흐르는 아무르 강을 가리킨다. 안중근 의사가 190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 아무르 강을 건너 단지동맹을 맺었다.월간 '영웅'을 발행하는 도서출판 '꼬레아 우라'는 아무르강 4000㎞의 유장함과 안 의사의 깊은 한을 민족어 아리랑에 반영한 '아무르 아리랑'을 높게 평가했다.이 아리랑은 윤은화(양금연주자)가 편곡하고, 유명옥(서울아리랑보존회 회장)이 창을 맡아 음반으로 제작할 예정이다.월간 '영웅'은 '안중근 의사의 뜻과 사상을 되살려 통일 대한민국과 세계 평화의 길잡이로 삼겠다'는 취지로 창간됐다.【서울=뉴시스】'아무르 아리랑'안중근의거 106돌 기념일인 지난 26일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월간 '영웅' 창간 기념식을 열었다.이날 배포된 창간호는 안 의사 증손자 안도용씨의 글, 3대에 걸쳐 안 의사에 대한 사랑을 실천해 온 윤자성 미국 안의사기념사업회 회장 인터뷰, 김월배 중국 다롄(大連)외국어대 교수의 논문 등으로 채워졌다.월간지 제호 공모전에는 초등학생부터 80대까지, 남녀노소가 참여해 232편이 응모됐다.발행인은 박창재 에픽소프트 대표다. 2013년 안중근의사숭모회가 주관하는 '안중근 아카데미' 강의(15주)를 수강한 뒤 사비를 털어 잡지를 창간했다.realpaper7@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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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양의 아리랑로드 (1997-2020)아리랑로드 답사기 기미양_러시아 동포와 함께, 겨레기념일 ‘아리랑의 날’ (뉴시스. 2017-10-01) 기미양_군함도탄광과 아리랑고개 (영웅, 8월호, 2017. 코레아우라) 기미양_지옥섬 군함도, 아리랑 고개 낳았다···저항·대동·상생 (뉴시스, 2017.07.03.) _기미양 “2014, 아리랑 창조적 계승의 해”…위대한 3대 성과 (뉴시스, 2014-12-3) 기미양_민간주도 아리랑의날, 전국 7곳 열광…국가차원 지원 절실 (뉴시스. 2014-10-13) 기미양_우리의 무기여, 아리랑이여!”…기미양 북간도 답사기, (뉴시스. 2015.08.10) 기미양_왜 우리는 일본의 아카지마 아리랑 고개로 가는가" (뉴시스. 2015-02-06) 기미양_7세 박주빈·25세 송미진, 日아카지마 아리랑평화음악제 합류 까닭, (뉴시스, 2015-02-06) 기미양_안 의사 아리랑' 마침내 탄생, 안중근 동양평화론 현장 가다, (뉴시스 2014.07.28.) 기미양_아리랑 루트 확인, 설정…남은혜·기미양·김연갑 '삼인삼색 연변기행' (뉴시스 2013.08.26.) 인쇄하기 닫기 사회 > 사회일반 “우리의 무기여, 아리랑이여!”…기미양 북간도 답사기 등록 2015-08-10 11:28:36 | 수정 2016-12-28 15:26:09 【북간도=뉴시스】중국 방천에서 북중러접경지대를 조망하다. 조러대교가 보이고 북한 두만강시가 펼쳐져 있다. 멀리 압록강 하류가 끝나는 곳에서 동해바다가 하늘과 맞닿아 있다. 【북간도=뉴시스】기미양 이사 (아리랑학회) = 2013년 북간도 지역 음악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갔을 때는 ‘북간도답사’였다. 2014년 안중근의사독립운동유적지를 찾았을 때는 ‘조·중·로접경지역답사’였다. 그리고 이번 북한대학원대학교 답사는 ‘북·중접경지역답사(단장 이우영 교수)’였다. 모두 같은 역사성으로 연결되는 지역이지만 답사 목적에 따라 지명을 달리했다. 북간도, 또는 만주나 동북삼성으로 불려지는 이 지역은 나로서는 주최 측의 목적에 더해, 나름으로 늘 가슴에 절절하게 담았던 화두를 갖고 갔기 때문에 이런 지명의 의미가 각별하게 다가왔던 듯하다. 첫 번째 답사는 남은혜 명창의 음반 ‘북간도아리랑’을 구상하기 위해서였고, 두 번째는 안중근의 의병정신을 주제로 한 ‘아무르아리랑’을 구상하기 위해서였고, 이번에는 항일무장 투쟁 ‘무기로서의 아리랑’ 현장을 가슴에 담는 것이 개인적인 관심사였다. 무기로서의 아리랑이란 주제를 가슴 속에 담은 것은 두 가지 계기에 의해서이다. 하나는 북한의 음악정치 원천이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 시절 보천보전투와 간삼봉전투에서의 아리랑으로부터라는 사실 때문이다. 또 하나는 최근 읽은 1940년대 말 미국 좌파 포크그룹 <얄마닉 싱어즈>(Almanac Singers)의 ‘무기로서의 노래(Use of Songs as a weapon)’ 동아리 활동상의 감동에서다. 이들은 아리랑을 반전음악으로 사용한 피터 시거(PETE SEEGER)와 맥을 잇는 그룹으로서, 세계 저항음악을 말할 때 내 놓는 ‘무기로서의 노래’라는 슬로건을 창출한 음악가들이다. 필자의 과잉된 생각일런지는 몰라도 일제항일투쟁기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투사들의 아리랑 변용은 바로 이들보다 앞서 노래를 무기로 변용한 사례로 꼽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실례는 김산의 아리랑, 정율성의 아리랑, 광복군아리랑, 그리고 김일성의 아리랑 등을 그렇게 본다는 관점이다. 향수를 달래주고, 공동체적 친밀감으로 일체감을 형성시키고, 배우지 않아도 부를 수 있는 아리랑 곡조에 항일적인 사설을 담은 것이다. 이는 향유하는 노래이면서 저항하는 무기이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있을 수 없는 아리랑의 ‘창조적 계승’인 셈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7월 18일부터 24일까지의 조중접경지역 답사 내내 1930년대 말 중국 항일전선 지역으로 돌아가 나운규가 영화 아리랑을 구상했던 용정, 김산이 다닌 신흥무관학교가 있었던 유하현 합리하, 김정숙이 김일성을 만나러 건넌 삼합, 보천보전투가 있었던 혜산진이 보이는 장백현, 뗏목아리랑이 흘렀던 압록강변에서 나운규와 김산, 그리고 정율성과 김정숙의 아리랑을 되살리려 노력했다. ◇독립당 출몰, 영사관 오도빠이···아리랑 아리랑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일제강점기 한반도에서는 부를 수 없는 아리랑이 중국과 러시아에 이르는 접경지대에서 불려졌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 있게 보게 된다. 필자가 수집한 자료 중 가장 앞서는 것은 1932년 7월 김경재가 북간도 상황의 기록 중에 조사한 다음의 사설이다. “독립당의 출몰이 자즈니/ 영사관 오도빠이 달린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백두산=뉴시스】백두산 천지에서 아리랑남북공동등재를 기원하면서. 간도 용정에 있던 일본 영사관이 ‘독립운동가’를 색출하려고 싸이렌을 울리며 내달리는 상황을 아리랑에 각인시켰다. 일제의 오토빠이는 독립당을 추격하는 상징임을 모두에게 알림과 동시에 독립당은 계속해서 출몰할 것임을 말한 것이다. 이런 전승양상은 결정적으로 1941년 중경임시정부가 3대 군가의 하나로 채택한 광복군아리랑에서 진가가 발휘된다. “우리네 부모가 날찾으시거든/ 광복군 갔다고 말전해 주소/ 후렴-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넘겨주소/ 동실령고개서 북소리 둥둥나더니/ 한양성 복판에 태극기 펄펄날려요.” 아리랑이 고난 극복의 추동체라는 사실을 말할 때, 떠올리는 이 광복군아리랑은 국내 진공작전으로 일제를 밀어내고 승리한 기쁨을 앞당겨 자축하게 함으로 용전의 힘을 내게 하였다. 곡조가 밀양아리랑이니 배우지 않고도 즉석에서 합창할 수 있었으니 유용한 심리전술의 무기였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강렬하게 되살아 난 아리랑 사연은 2013년 북간도답사 때 연길 정암촌에서 중국동포 음악가 김봉관 선생이 전해준 이야기이다. 요약하면 독립군 빨지산 활동상의 가슴 아픈 아리랑 사연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 관동군 토벌대들이 산골짜기에 들어섭니다. 앞장에 선 ‘길 안내자’는 흰옷을 입은 조선족 노인이었습니다. 주위의 산봉우리를 둘러보던 노인은 목청을 뽑아 ‘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이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도 못가서 발병난다…. 【북간도=뉴시스】2015 조중접경지역 답사 이동경로. 두만강 하류에서부터 백두산, 백두산에서 두만강 상류~하류. 미구에 노인은 일본군인의 군와 총에 쓰러지고 포위망을 늘인 항일유격대들의 분노의 총소리는 노인이 못다 부른 아리랑의 노래 가락을 이어갔답니다. 중국 조선족 가운데 널리 알려진 항일투쟁 이야기입니다. 조선 노인을 왜놈 토벌대가 들이닥쳐 빨지산을 대라고 하며 끌고 갔는데, 노인은 약속한 장소로 가서 의연하게 아리랑을 불렸다 말입니다. 그것은 신호입니다. 그러니 아리랑은 처절한 왜놈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지요.” 일본 토벌대(討伐隊)와 독립군 간의 추격전에서 “**도 못가서···”라는 대목의 숫자는 일본 토벌대의 규모를 알리는 것이다. 암호로 쓴 것인데, 어느 단계에 이르러 이러한 사실이 간자에 의해 일제에 알려졌고, 결국 독립군을 돕던 한 노인이 이 암호를 쓰다가 희생됐다는 이야기다. 이는 중국민족학교 황유복 교수의 ‘힌 옷의 동포’라는 책 속에도 들어있어 사실로 받아 들여지는 이야기다. 이런 맥락에서 북한의 김일성과 김정숙의 아리랑 사연도 관심 있게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앞에서도 말했듯 북한의 음악정치는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 제7사 활동의 최고 전과라는 보천보전투와 간삼봉전투에서의 아리랑 역할을 확대, 재현한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항일전선에서의 아리랑은 다양한 상황에서 확인 되는 것인데, 북한의 불후의 고전명작 ‘한 자위단원의 운명’이나 혁명가극 ‘밀림아 이야기 하라’, 그리고 다부작(多部作) 영화 ‘민족과 운명’에서 불린 아리랑이 이런 상황에서 확장된 것이기 때문이다. <보천보와 간삼봉전투 아리랑> 【북간도=뉴시스】북한대학원대학교 2015 조중접경지역 현장답사단(단장 이우영 교수) 보천보에 홰불 올린 혁명군은 기세 높아/ 간삼봉의 싸움터엔 노래소리 드높았네/ 빨찌산녀장군이 선창 떼신 아리랑/ 봉이마다 릉선마다 뢰성타고 울렸네/ (후렴) 아리랑 스리랑/ 간삼봉에 불비 와서 아라리가 났네. 이 ‘간삼봉전투에 울려퍼진 아리랑’은 앞서 치러진 보천보전투에 이은 승전으로, 이 때 김일성과 김정숙이 아리랑을 함께 불렀다는 사실을 표현했다. 당시<매일신보> 1937년 7월 9일자가 보도한 ‘토벌대와 교화 중에도 노래 부르는 여당원, 김일성 일파 공비 격퇴’에서도 추정되듯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1930년대 후반기 중국에서의 항일투쟁이 침체에 빠지는 시기로 중국군벌의 도움으로 유지되던 독립투쟁이 지하화 하는 상황에서 거둔 승전보였다. 이 승전은 일본 경찰을 격퇴한 전투로 김일성의 존재를 분명하게 알린 전투이다. 1992년 4월 김일성 80회 생일 기념으로 발행된 자서전『세기와 더불어』에 두 전투에서 아리랑이 혁명의 동지로 기능했다는 사실을 기록하였고, 이를 계승, 2002년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으로 형상화시킨 것이다. 1937년 6월 4일 새벽, 일방적으로 대승한 전투, 장백현에서 보이는 함경남도(현 양강도) 혜산진으로부터 20㎞ 떨어졌다는 기록을 되살려 응시했지만 보이지 않았다. 다만 상상의 전투신이 오버랩 되었다. 빨치산 전투방식대로 방화를 통한 충격과 주재 일본경찰을 비롯한 일인 관리만을 처단하여 공포심을 극대화 했다. 이 사실을 언론에 전해주어 대서특필, 동아일보는 호외까지 발행하게 했다. 선전선동 활동으로 군사적 성과 이상의 정치적 성과를 거둔 전투였다. “간삼봉 전투장에 울린 <아리랑>은 혁명군의 정신적 중심을 비쳐 보이고 낙천주의를 시위하였다. 적들이 <아리랑>을 듣고 어떤 기분에 잠겼겠는가 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후에 포로들이 고백하기를 그 노래를 듣고 처음에는 어리둥절해졌고 다음 순간에는 공포에 잠기였으며 나중에는 인생 허무를 느꼈다고 하였다. 부상자들 중에는 신세를 한탄하며 우는 자들도 있었으며 한쪽에서는 도망병까지 났다.” 김일성의 ‘세기와 더불어’ 제6권에 나오는 대목이다. 무장투쟁 사상 처음으로 가장 큰 규모의 국내 진공작전으로 평가하는 전투에서 아리랑을 불렸으니 북한이 아리랑을 ‘혁명동지’로 표현할만한 것이다. 【북간도=뉴시스】수풍댐에서 배를 타고 북한 사람들의 일상과 만나다. 우리가 손을 흔들면서 “안녕하세요”라고 외치면 그들도 손을 흔들며 웃어 준다. ◇백두산은 없고 장백산은 있다 그런데 이런 나의 ‘1930년대 아리랑 여행’(?)에서 현실로 일깨운 것은 백두산 답사에서였다. 그 이유는 천지를 오르기 위해 세 번이나 중국에 돈을 내야함은 물론 모든 표기에서 백두산이 아닌 ‘장백산’이라는 사실이었다. 여기에 조선족 동포들이 부르는 ‘장백산아리랑’이 조선족 스스로가 현실적으로 중국신민임을 상징적으로 표현 한 노래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내심 더욱 안타까웠다. 그래서겠지만 이 노래는 1983년 전국민족단결현상모집에서 창작상을 받기도 했다. <장백산아리랑> “그 옛날 천지엔 선녀 내렸고/ 오늘은 세월 좋아 벗님들이 이 고장에 찾아 오누나/ 신선의 꽃 활짝 피는 우리네 장백산은/ 중국의 명산이요 연변의 자랑일세.” 조국(조선이나 대한민국)의 명산이 아니고, 중국의 명산이고, 연변의 자랑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름도 백두산이 아니고 장백산이다. 만일 북한 지역에서 오른다면 장백산이 아닌 백두산임은 당연한 명칭이다. 이런 문제를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자 갑자기 1930년말 상황과 달라진 것인 없다는 생각에서 천지에 오르는 발길이 너무나 힘겨웠다. 조중접경지 7일간의 답사, ‘여행’이 아니고 ‘답사’여야 하는 이유를 실감했다. 아리랑조차도 역사와 현실적 해석을 달리해야 하고, 산에 오름이 분명 여행이고 등산임에도 여행이 아닌 답사임은 아주 오랫동안 우리의 인내를 필요로 할 듯하다. 중국의 역사와 현재, 이곳에서 만나는 조선족이라는 중국신민들, 그리고 멀리서만 볼 수밖에 없는 북한이 중첩된 곳이기에, 이를 어떻게 풀어 낼 것인지가 막막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다시 무거운 마음으로 답사를 계속해야 할 것이다. www.arirang21.org Copyrigh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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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지마 아리랑⑥]그 이름 아리랑, 인류보편 ‘고난의 메타포’인쇄하기 닫기 국제 > 아시아/대양주 [아카지마 아리랑⑥]그 이름 아리랑, 인류보편 ‘고난의 메타포’ 등록 2015-02-16 16:19:52 | 수정 2016-12-28 14:35:25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지마(阿嘉島)의 아리랑고개를 찾아 위령제를 올렸다. 유일한 20대 단원 송미진씨가 당시 위안부 숙소 앞에서 오열했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오키나와=뉴시스】김연갑 상임이사·사단법인 한겨레아리랑연합회 = “조국의 아리랑은 나의 영혼이자 블루스, 내 몸 안의 DNA와 같다.” 교포2세 가수 아라리 에이치, 박영일(新井英一)이 한 말이다. 1994년 발표한 <청하아리랑>(清河への道~48番)이 주목을 받아 1995년 일본 레코드 상을 수상했고, tbc TV 10시 메인뉴스 테마뮤직으로 1년간 방송되었다. <청하 아리랑>은 그가 아버지의 고향인 경북 청하군(현 포항시 북구 청하면)을 방문한 뒤 작사·작곡한 작품이다. 교포2세로 차별을 받고 미군 기지에서 이국인 취급을 받은 서러움을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나는 간다”라고 강렬한 목소리로 외쳤다. 1950년부터 후쿠오카 이와쿠니 미군기지에서 접시닦이를 하다 미국행을 한 후 정체성을 지닌 노래를 해야한다는 강렬함에 부르게 된 노래다. “아리랑은 특별한 고난을 겪은 이 만이 부르는 특권을 가진 노래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자기 나름의 고난을 가진 사람, 그리고 거기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내려는 이에게 보편적으로 어필하게 하는 힘을 가진 노래다. 이런 의미에서 고난의 메타포(metaphor)로서의 아리랑은 반드시 조선이라는 공간이나 조선인이라고 하는 민족에 한정되어 있지 않은 보편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스스로의 삶을 드라마화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강력한 리소스(財源)인 것이다.” 아리랑을 연구한 일본 학자가 쓴 글의 일부이다. ‘고난의 메타포’라고 했다. 이어 교표2세들의 아리랑을 살펴본다. 바로 이들의 부친 대부분은 징용에 끌려왔다 잔류한 이들이다. 백룡의 <아리랑의 노래>는 아마도 동포2세들이 공통으로 갖는 아리랑의 정서일 것이다. “술을 드신 아버지가 부르는 노래/ 그것은 고향의 멜로디 아리랑의 노래/ 그 무엇을 그리며 부르시는 걸까/ 그 때의 현해탄 아니면 어릴 적 고향산하/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아리랑 고개로 넘어가네.” 호타루 아리랑 <특공대의 노래> 붉은 피가 샘솟는 요카레노(특공대의)/ 일곱 개의 제복단추 아침 해에 빛난다/ 오늘도 비상한다 가노야의 창공에/ 큰 희망의 부푼 구름 샘솟네 치쿠호우(筑豊) 탄광 아리랑 우리의 고향은 경상북도인데/ 나는야 어째서 숱(석탄)파러 왔느냐/ 일본땅 좋다고 누가 말했냐/ 일본땅 와보니 배고파 못살겠네/ 숱 팔 때는 배고파 못살겠네/ 이 말만 하면은 몽둥이로 맞았네/ 배가 고파요 어머니 보고 싶어요/ 눈물을 흘리면서 편지를 내었네/ 어머니 소리도 크게 못하고/ 감독이 겁나서 가만히 불렀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넘어 간다 봄 아리랑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지마(阿嘉島)의 아리랑고개를 찾아 한국인 위안부들의 넋을 달랬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영감이 어디로 가나?/ 아리랑 고향에는 살수가 없어/ 추운 만주로 쫓기어 간다/ 아리랑 아리랑 정처 없이/ 아리랑 국경을 넘어서 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동포는 무엇을 먹나?/ 아리랑 나라는 쌀의 나라/ 아리랑 동포는 좁쌀도 없다/ 무자비한 왜놈에게 빼앗기고/ 오소리 지주에게 착취당해 이런 아리랑을 부르는 재일동포는 70여만명, 부라쿠민(部落民; 천민 후예), 오키나와인에 이은 세 번째 소수자 집단이다. 천민계급이 피차별부락(被差別部落)이었다가 부락만 남았다. 아이누족, 오키나와인, 재일 한국인, 재일 중국인, 류큐인과 함께 일본 내의 대표적 소수 집단이다. 재일동포 아리랑은 이런 굴곡을 헤치고 피어난 꽃이다. 아리랑은 기존의 구비문학 또는 민요 서술의 지배 담론과는 다른 시각에서 의미체계를 구성해야 함을 일깨운다. 텍스트로서의 특정 아리랑에 대한 물음의 해답은 하나이다. 그러나 아리랑 문화로서의 물음에 대한 답은 여러 가지이다. 이 일본 속의 아리랑이 그렇다. 어찌 민요론적인 해석으로 답할 수 있는가? 역사적 전개와 맥락에서 아리랑을 조감해야 함을 실감한다. 아리랑은 전승과 창조적 계승에서 자발적이라는 사실과 역사적 지속성, 문화적 개성, 현실적 가치에서 탁월한 보편성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다른 문화유산과 다르다. 보편적이되 특수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 오키나와로부터의 아리랑은 이런 현학을 떠나 더 높은 것이어야 함을 깨우쳐 준다. 만국진량(萬國津梁), ‘만국에 열려있는 가교’, 1458년 제작된 류큐국 종(鐘)에 세겨진 경구이다. 아리랑은 만국에 열려있고, 만국을 노래해야 한다. 그래서 만국에 통해야 한다. 만국을 위해! 누치토타가라! 생명 이상의 존귀함은 없다! 이 귀한 두 경구(警句)에 아리랑이 있어야 한다. 루치난추 대대로 내려오는 이 경구는 수없는 역사적 고난을 극복하며 얻은 진리일 터, 어쩌면 우리의 피, 우리의 아라리가 담겨있을 터! 누치토타가라 아리랑! 누치토타가라 아리랑! 누치토타가라 아리랑! www.arirangsong.com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쇄하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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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지마 아리랑③]일본으로 끌려간 한국남녀, 군부·위안부 아리랑인쇄하기 닫기 국제 > 아시아/대양주 [아카지마 아리랑③]일본으로 끌려간 한국남녀, 군부·위안부 아리랑 등록 2015-02-16 16:21:06 | 수정 2016-12-28 14:35:25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지마(阿嘉島)의 아리랑고개를 찾아 한국인 위안부들의 넋을 달랬다. 이어 나하(那覇)로 돌아와 평화로서의 아리랑을 논했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오키나와=뉴시스】김연갑 상임이사·사단법인 한겨레아리랑연합회 = 일본군 위안부(日本軍 慰安婦), 역사의 산 증인이며 평화의 각성자! 일본이 만주사변(1931년 9월18일)을 일으킨 이후부터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1945년까지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설치한 ‘위안소’에 강제 동원되어 일본군의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여성을 말한다. 문헌과 증언 속에서는 위안부가 작부, 특수부녀, 추업부(醜業婦), 예기, 창기, 여급 등의 호칭으로 나타난다. 일본군의 위안소도 육군오락소, 구락부, 군인회관, 조선요리옥 등의 호칭으로 불렸다. 이런 위안부의 총수는 최소 3만명에서 최대 40만명까지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으나 최소 8만, 최대 20만으로 추정한다.(요시미 요시아키 吉見義明) 주목되는 것은 전체의 절반 이상이 우리 누이들이라고 한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조선과 타이완 여성들을 주로 동원하였으나 전쟁이 장기화되고 전선이 확대됨에 따라 일본의 점령지인 중국·필리핀·인도네시아·베트남·미얀마·인도네시아 거주 네덜란드인 여성들도 강제 동원되었다. 지금까지 증언록『들리나요? 열두소녀의 이야기』나 북한 박영심 할머니(2006년 작고)가 중국 숭산 등지에서 ‘위안부’로서 겪었던 참상을 담은 중국 운난성 쿤밍의 미군관할 포로수용소 미국정보당국 보고서, 그리고 운난성 전 일본군 하야미 마사노리의 증언 등을 통해 확인된 위안부 동원 방식은 취업사기, 협박 및 폭력에 의한 동원, 인신매매 및 유괴 같은 극단적인 방법이었다. ‘공장에 취직시켜 주겠다’,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속여 동원하였다. ‘위안부’를 모집한다는 신문광고가 나가기도 하였으나 근무 내용을 분명히 고지하지 않았고 당시 신문 구독상태나 여성의 문자해독율을 고려할 때 여성에게 직접 모집 광고가 전달된 사례는 거의 없었다고 본다. 일본군 당국이 위안소를 경영할 업자를 선정하였고, 일본군과 경찰 역시 동원 과정에 협조했다. 업자들은 모집인을 이용하거나 자신들이 직접 나서서 여성들에게 접근하였다. 취직이나 돈벌이를 미끼로 여성들을 끌어 모으거나 협력과 폭력을 이용하여 동원하기도 하고, 심지어 납치하기도 했다. 총동원체제와 전쟁을 수행하는 데 위안부가 필요하다는 일본군의 요구가 이러한 물리적 폭력을 허용했던 것이다. 태평양전쟁 발발(1941) 이전에는 ‘도항증명서’를 받아 국외의 위안소로 이동하였다. 수속에 필요한 절차는 모집인이 공권력의 협조를 받아 도맡아하였다. 이 과정에서 호적이 위조되는 일도 있었다.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에는 ‘군증명서’를 통해 국외의 위안소로 이동하였다. 군증명서는 모집인이나 인솔자가 소지했으며 일본군은 이동에 필요한 각종 편리를 제공했던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위안부 할머니를 말할 때면 언제나 아리랑을 연관 지어 표현하고 있다. 아리랑이 슬퍼서인가 위안부 할머니들이 슬퍼서인가? 검색어 아리랑 또는 위안부를 치면 ‘위안부영화 아리랑 국악 신동···’, ‘위안부 할머니 주제가 소녀아리랑’, ‘일본군 위안부 사할린 아리랑’, ‘수필, 아리랑 위안부·마루타 생체···’, ‘아리랑의 눈물(Tears of Arirang) & 미국 비밀문서 일본 위안부···’ 등 너무나 많다. 이 중 ‘하늘로 간 아리랑’은 21살이던 1942년 부산 영도다리 근처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다 일본군에 끌려가 가족에게 작별인사도 못하고 싱가포르와 태국으로 끌려 다니며 3년간 위안부로 고통을 겪었던 노수복 할머니의 운명 보도 기사 제목이다. 1945년 일본군 패전 뒤 태국 유엔포로수용소에 잠시 수용됐다 탈출, 말레이시아를 거쳐 태국 최남단인 핫야이까지 도망쳐 살았다.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태국에서 식모, 식당 종업원 등으로 일하며 갖은 고생을 했다. 결국 모국어도 잊어버렸다. 세상을 뜨기 전 그가 기억한 한국말은 ‘안녕하세요’와 고향 주소인 ‘경북 안동군 풍천면’, 그리고 아리랑이었다. 1984년 중앙일보 기자에게 “아리랑이 나를 살렸지, 왜놈 밑에서 아리랑을 부르며 견뎠지···”라고 말했다. 이 기사 이후 태국 주재 한국대사관을 통해 한국의 가족을 찾아달라고 요청하면서, 42년 만에 처음으로 고국 땅을 밟았다. 1991년 한국을 다시 한번 방문했고, 2011년 광복절을 앞두고 정대협 초청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왔다. 휠체어에 앉은 채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수요시위’에 참가했다. 그리고 아리랑을 부르고 “메이디 막 막”(너무 너무 나쁘다)이라며 눈물지었다. 그해 14명의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 저 세상으로 가셨다. 이후 1998년 50년만에 귀국한 훈 할머니 등 우리말을 잊었지만 아리랑은 부른다는 해외 위안부 할머니들이 증언이 잇따랐다. 재일동포 박수남 감독의 <오키나와로부터의 편지-아리랑 노래> 등에는 일본 내 수십 곳의 위안부 사연과 아리랑을 제시하고 있다. 이 중 <오키나와로부터의 편지-아리랑 노래>에는 1944년 10월10일, 일본의 남서제도인 오키나와 본섬을 중심으로, 미군 함재기에 의한 무차별 폭격이 오전부터 오후 4시까지 이어져 수도격인 나하(那覇)시 가옥의 90%가 파괴됐고 사망자 600명, 부상자가 900여명에 이르렀고, 1945년 3월26일 미군이 오키나와 본섬 인근 게라마(慶良間) 제도에 상륙, 최초의 지상전에서 일본군과 미군은 물론 오키나와 원주민, 조선인 군부, 종군위안부 등 다수가 사망하거나 부상했음을 밝히고 있다. 일본군은 오키나와 주민과 조선인 군부들을 스파이 혐의로 학살했고, 특히 현지 주민들에 대해서는 ‘강제집단사(집단자결)’를 강요하고 실행했다. 이 오키나와 전쟁은 6월22일 일본 남서제도를 담당했던 32군 대장의 옥쇄로 종결되었지만, 이 사실을 몰랐던 잔류 일본군은 8월15일 이후까지 류쿠 열도 각지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해 많은 주민들의 희생시켰다. 희생자는 일본군 9만8000명, 미군 1만4000명, 조선인 군부 및 종군위안부 1만명, 오키나와 주민 9만8000명이다.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지마(阿嘉島)의 아리랑고개를 방문, 일본 제국주의에 희생당한 한국인 위안부들의 영혼을 위로했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아! 오키나와 아라시로 토시아키 평화기념공원의 오키나와전쟁 희생자를 기리는 <평화의 초석>(2009)에는 희생자의 이름들이 인각되어 있다. 오키나와 현민 14만9171명, 미군 1만4009명, 영국군 82명, 대만인 34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인 82명, 대한민국인 364명, 총 24만명이다. 그렇다면 오키나와전쟁에서 조선인은 얼마나 희생되었는가. 아라시로 토시아키나 아라사키 모리테루의 연구에 따르면, 대략 1만여 명의 조선인이 희생당했다. 그 희생자 속에는 오키나와로 징병된 학병(전문학교 재학 이상 학력의 징병자), 지원병, 군부, 위안부, 이전부터 오키나와에 체류했던 민간인 등이 모두 포함된다. 그런데 왜 오키나와전쟁에서 1만여명 이상이 희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비에 새겨진 숫자는 겨우 446명뿐일까? 그 이유는 첫째, 조선인 출신임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침략전쟁에 동원되어 비극적 죽음을 맞은 굴욕적 장소에 이름이 ‘각명’되는 것을 유족들이 거부한 경우가 대다수라는 것. 둘째, 일본의 정치 세력이 체계적으로 전쟁책임과 전후배상을 부정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희생자의 이름을 각명할 수 없다는 점. 셋째, 조선인 희생자의 유해 발굴 및 조사를 일본정부 및 오키나와 현정이 사실상 방기함으로써 죽음의 진실이 은폐되고 있다는 점. 더 이상한 것은 1945년 이전은 국적이 모두 조선이어야 하는데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표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분산으로 숫자를 줄이고, 배상에서 차이를 두겠다는 속셈이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장에서 각오해야하는 사실은 오키나와전쟁에 ‘강제연행’된 조선인들의 비극을 해원(解寃)하기 위해서는 남북한과 일본, 오키나와 모두의 합동 조사와 발굴이 필요하다는 사실과 특히 이런 역사 문제에 대해서는 남북이 일치된 견해와 행동력을 수반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제 다시 오키나와 위안부 문제로 들어가 본다. 오키나와전쟁의 막바지에 패전을 확신한 32군 사령부는 관련 서류 일체를 소각했다. 어쩔 수 없이 합리적인 추론을 통해서 밝혀야 할 것이지만 오키나와 본섬에만 대략 130여 군데의 위안소가 있었고, 조선인 종군위안부가 있었다고 확인된 위안소는 41개소이다. 위안소 시설당 대체로 7~10명의 위안부가 있었음을 추정하면 최소 287명(41×7), 최대 410명(41×10) 정도가 오키나와 본섬에 강제 연행되어 체류했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일본군이 강제연행한 위안부 중 조선인 51%, 중국인 36%, 일본인 12%라는 기록에 견주면 조선 출신 위안부는 최소 460명, 최대 660여명에 이른다. 다시 주목한다. 이상의 추정 숫자는 오키나와 본섬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류큐제도에 속해 있는 미야코나 야에야마 제도에도 일본 32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오키나와 본섬과 마찬가지의 군 위안소가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숫자는 1000여 명 가까이로 늘어나게 된다. 다큐멘터리영화 <오키나와전의 증언>(자나모토 케이후쿠 謝名元慶福 감독, 1피트운동회, 2005)은 조선 출신 일본군 위안부가 1000명 이상 오키나와로 ‘강제연행’된 것으로 증언하고 있다. 1991년 오키나와전쟁 당시의 조선인 강제연행 문제를 <아리랑의노래>라는 제목으로 영화화한 재일조선인 박수남 감독의 증언집 <아리랑의 노래>는 이들의 수보다 더 큰 아픔들을 기록하고 있다.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지마(阿嘉島)의 아리랑고개를 찾아 한국인 위안부들의 넋을 달랬다. 다섯살 때 음반 ‘고개의 노래, 문경아리랑’의 프롤로그를 맡은 박주빈(7)군이 술을 올리고 있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1944년 7월9일. 경상북도 농촌지역에서 강제징용 명령장을 받은 일군의 조선인 청년들은 그들이 속한 면사무소에 강제연행된 후 기차를 타고 대구에 도착한다. 이들은 숙영지였던 대구사범학교에서 며칠을 머문 후 열차 편으로 다시 부산으로 이동했으며, 여기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7시간의 항해 끝에 시모노세키(下關)에 도착한다. 이들이 북규슈(九州)의 모지항(門司港)에 도착한 것은 7월22일이었으며, 강제연행된 조선인은 3000여명이었다. 그곳에서 일본군 12만명과 함께, 26쌍의 거선(巨船)을 타고 항해를 다시 시작한 것은 7월30일. 거친 풍랑과 미군 잠수함의 공격을 피해 8월1일 가고시마(鹿兒島)현에 도착했다. 8월3일 가고시마항 출항. 8월5일 파파야와 야자수가 출렁거리는 아마미 제도에 도착. 그곳에서 4개월여 체류하면서 군부로서 진지공사를 한 후에 다시 출항한 것이 12월16일이었다. 항로는 가고시마현 도쿠노시마(德之島)였다. 오키나와가 가까워졌다. 12월21일 도쿠노시마를 출발해 12월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오키나와현의 수도 격인 나하항에 도착했다. 이날로부터 오키나와전쟁이 사실상 종료되는 8월15일까지, 조선인 군부 조장이었던 김원영은 고스란히 전쟁의 희비극을 체험한 후, 전쟁 말기에 미군에 항복해 포로수용소에 수용되게 된다. 그렇다면 조선인 위안부들은 어떤 경로를 거쳐 오키나와에 입도했는가. 근로정신대로 속아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연행된 여성들은 군부들의 이동 경로와 유사한 방식으로 오키나와에 왔을 것이다. 다만 군부들이 대체로 경상북도 촌 출신이었다면, 조선에서 연행된 종군위안부들은 대체로 16~19세의 전라도, 충청도 출신이었다는 증언이 눈에 띈다. 중일전쟁 이후 일본군은 군과 민간이 결합한 형태로 진지에 위안소를 만들었으며, 이 시기부터 집중적으로 조선인 위안부들을 ‘강제연행’하기 시작했다. 때문에 1944년 이전에 이미 일본군은 위안부로서 만주 및 중국 전선에 있었던 조선인 위안부들은 오키나와로 재배치된 일본군 제9, 24, 28, 62연대와 함께 오키나와 본도 및 미야코, 야에야마 제도로 흩어졌을 것이다. 일본 본도 및 대만 그리고 남양에 흩어져 있던 종군위안부 역시 패퇴하는 혹은 오키나와로 재배치된 일본의 육해군 부대나 학병, 특별간부후보생(특공하사관)과 함께 오키나와 본도 및 미야코, 야에야마 제도로 연행되었다. 군부(軍夫)는 군속(軍屬)의 최말단 노무자로 일본군 작업복을 입었지만 무기는 지급되지 않았다. 물론 전쟁 막바지의 옥쇄투쟁 과정에서는 일본군 부대장이 죽창으로라도 미군과 싸우라는 지시를 했지만, 그런 명령을 내린 자들은 물론 군부 역시 자연 가마(오키나와에서 ‘동굴’을 이르는 말) 방공호 입구에서 대변을 보다가 폭사(暴死)하기도 하는 등 삶은 비참했다. 일본어를 유창하게 한 군부들은 조장(軍夫頭)도 했다. 그러나 대다수는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려 해상자살특공대의 2인용 선박인 말레를 은폐하기 위한 기지 건설에 동원되었고, 평온할 때는 식량 공출이나 종군 위안부 위안소 건설에 동원되기도 했다.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지마(阿嘉島)를 방문, 현지 주민과 평화의 악수를 나눴다. 아리랑 음반도 전달했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같은 조선인으로 만났을 때 얼마나 비참함을 느꼈을까? 그런데 조선인 군부들은 면사무소에 입소하여 오키나와에 올 때까지 여러 차례에 탈영을 했다고 한다. 대개는 실패한 경우가 더 많았는데, 탈영하다가 붙잡힌 조선인 군부를 각 조원 70명이 죽봉으로 힘을 다해 구타하라는 끔직한 형벌이 있었다. 이렇게 살아 오키나와까지 와서 한 곳에서 폭격을 받아 전사했다는 것이다. 위안부들의 생활도 비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위안소 건물도 없었기에 군부들이 위안소를 건설할 때까지는 오키나와 원주민의 집에 일시 거주하기도 했지만, 위안부 다수가 일본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실정이어서 그들이 도착한 곳이 어딘지도 몰랐다고 할 정도이다. 오키나와 현지인들에게 조선인 종군위안부들의 이미지는 치마저고리와 조선 민요 아리랑으로 기억된다. 괴로울 때면 위안부들은 조선 민요 아리랑을 불렀고(군부 역시 그랬다고 김원영은 증언한다), 식량증산을 위해 야산에 동원되었을 때도 아리랑을 불렀다. 산속에서 우연히 아리랑 민요를 듣게 된 조선인 군부들은 이곳에도 조선 처자가 있구나, 놀랐다고 하는데 나중에야 그들이 위안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일본군 병사들에게 위안소 출입은 월 4회로 제한되어 있었지만, 장교들에게는 이러한 출입제한이 없었다. 위안소 이용은 일요일로 제한되었는데, 1회 이용 금액은 1엔(당시 병대 월급은 7엔)이었고, 휴가나 휴일이 되면 병사들에게 군 당국은 ‘돌격1번’이라는 콘돔을 지급했다. 위안부 1인에게 대략 70여명의 병사가 계급과 무관하게 줄을 섰다. 장교들은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었다. 중대장급 이상의 장교들은 위안부들을 ‘전속’으로 소유하려 했으며, 전쟁 말기까지 위안부들을 극한 전쟁터로 끌고 다녔으며, 위안부와 함께 자결하는 사례도 있었다. 당시의 일본군은 “살아서 치욕을 겪지 말라”는 ‘전진훈’에 따라 자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키나와인들과 조선인들을 향해서는, 미군에 항복하게 되면 “남성은 탱크로 깔아뭉개 죽이고, 여성은 강간한 후 죽일 것이다”라는 괴담을 유포시켰는데, 이 때문에 오키나와인과 조선인들은 미군에 항복하는 선택 대신 수류탄으로 집단자결(집당강제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군 병사들이 위안소에 지불한 돈은 어디로 갔을까. 아마도 위안소를 관리하던 일본인이나 포주에게 갔을 것이다. 기록을 읽어보면 위안소의 점주나 포주들은 대개가 일본군 상급 장교와 내연의 관계에 있는 여성들로, 대체로 그 연령대는 30대 중반 이상으로 위안부 출신인 경우도 있었지만, 조선인 출신이 있었다는 사실은 밝혀진 바 없다. 위안소의 설치와 운영, 위안부의 성병 관리는 일본군이 책임졌다. 하지만 위안소 운영을 통해 획득된 자산이 어디로 갔는가는 아직까지 뚜렷한 종착역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오키나와전쟁 과정에서 군부와 위안부는 여러 비극에 노출되었다. 전쟁 과정에서 군부가 죽는 것이야 능히 예측할 수 있는 것이지만, 막상 한계상황이 오자 일본군이 조선인 군부를 ‘스파이 혐의’로 의심하고 처단-학살하는 일이 잦아졌다. 오키나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스파이 혐의로 붙잡힌 조선인 군부를 처형하고자 했을 때,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필사적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죽을 때 죽더라도 한마디 하고 죽었으면 좋겠다. 그들은 무슨 말을 했을까? “텐노 헤이카 반자이! 반자이! 반자이!”(천황 폐하 만세!) 이렇게 외친 후 즉각 총살당했다. 오키나와인들은 그들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전쟁의 패색이 명백해지자 조선인 군부의 조장은 “우리는 조선인이다, 이제 각자 헤어져 살길을 도모하자”하고 해산 명령을 내렸다. 가마(동굴) 속의 군부들은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미군에 항복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 모두 옷을 벗고 두 손을 들고 항복하는 길을 선택했지만, 등 뒤 일본군의 기총소사로 죽어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지마(阿嘉島)의 아리랑고개를 찾았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오키나와전쟁 말기 대다수의 일본군 위안부들은 간호부가 되었다. 일본군에 강제연행되었던 위안부들은 전황이 안정화되어 있을 때는 성노예로, 전황이 악화되었을 때는 간호부로서의 이중역할을 강제당했다. 일본어도 몰랐고 오키나와어도 몰랐던 대다수 조선의 위안부들은, 마지막까지 일본군이 대피했던 가마에서 피 묻은 군복을 빨거나 가마 안에 사람이 가득한 데도 일본군 장교의 ‘성욕’에 고스란히 응해야만 했다. 그러나 위안부들은 스파이 혐의나 오키나와 주민들이 경험했던 ‘집단강제사’의 비극을 겪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미군의 기총소사나 폭격에 희생되기도 했지만, 살아남기 위해 모든 옷을 벗고 두 손을 든 후, 뒤에 따르는 조선인 군부와 일본군을 선도해 미군에 투항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군부와 위안부 모두 전쟁포로가 되었지만, 그들의 삶은 다른 경로로 전개되었다. 조선인 군부는 2차대전의 종전 소식을 포로수용소에서 들었다. 오키나와의 포로수용소는 민족별로 분류되어 분리 수용되었으며, 조선인들의 경우 하와이의 포로수용소로 이송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상황변화는 그동안 은폐되었던 조선인들의 일본군에 대한 분노가 노골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따라서 조선인과 일본인의 관계는 역전되었다. 그러나 조선인 종군위안부들은 또 다른 비극에 직면하게 되었다. 미군의 지프차를 타고 일본군과 조선인 군부가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한 후 “살아있었군요”라고 말한 후 포로수용소를 떠났지만, 일부는 오키나와에 은둔하는 길을 택했다. 해방된 조국으로의 귀국을 위안부들이 두려워하거나 포기한 것은 아마도 ‘가부장적 남근주의’가 지배적이던 조국에서 ‘환향녀’의 비난을 무릅쓰는 일의 공포와 함께, 위안부로서 삶의 존엄을 완전히 상실해 스스로를 긍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마지막으로 1972년 종군 위안부임을 최초로 밝힌 두 분을 주목하고자 한다. 1972년, 오키나와에서 ‘종군위안부’ 문제를 최초로 폭로한 이는 배봉기 할머니였다. 1972년은 오키나와가 미국의 점령지배 체제에서 일본으로 이른바 ‘조국 복귀’를 한 해였다. 일본의 행정당국은 1945년 이후 일본 본도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구(舊)일본국민이었던 조선인들을 무국적자로 처리했다. 이 와중에 배봉기 역시 졸지에 무국적자가 된 것이다. 당시 오키나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배봉기는 자신이 일본을 위해 ‘애국’을 했다고 말하면서 “한국으로 갈 수 없다. 생활보조금이 끊기면 나는 죽을 수밖에 없다. 이게 애국의 대가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한탄했던 것이다. 이로서 위안부 존재가 부각되었다. 배할머니는 정치적 집단들에 의해 주목을 받았다. 일본의 좌파들은 ‘일본제국주의의 잔인성’을 고발하고자 했고, 우파들은 온몸으로 ‘애국’한 구일본국민의 ‘국가에 대한 헌신’을 말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누구도 이에 주목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외쳤다. “나는 버림받았다. 조선에서도 또 일본에서도, 심지어 오키나와에서도.” 1984년 한국의 신문 기자에 의해 태국 한식당에서 손자의 자장가로 아리랑을 부른 노수복 할머니의 존재가 보도되었다. 이로부터 여자 정신대(위안부) 문제가 국내에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극한 상황에 처했던 위안부와 군부들은 왜 아리랑을 불렀을까? 앞에서도 제기했지만 아리랑이 슬퍼서도, 자신들의 처지가 슬퍼서도 아니었다. 자기 치유였다. 아니, 조선인이라는 공동체적 집단 치유였다. 신생아실(新生兒室)에서 한 아이가 울면 따라 우는데, 한 아이를 떼어 놓고 자신의 울음소리를 녹음하여 들려주었을 때는 따라 울지 않았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여 반응하는 심리(이타심 활성화)가 내재된 결과라는 것이다. 이는 영웅성, 선행을 따라하는 심리를 파악한 연구결과의 파생이론인데, 이를 ‘신생아성 반응현상’(新生兒性 反應 울음 現像)이라고 한다. 군부나 위안부들의 아리랑 부르기는 바로 이 현상과 같다는 것이다. 서로의 극한 처지를 아리랑을 통해 공감하는 심리가 작용한 결과이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 속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sympathy)이야말로 아리랑이 간직해 온 미덕이 아니던가를 새삼 확인하게 된다. 이들 군부와 위안부들의 아리랑을 가슴에 담았다면 결코 서정민요라고 해서는 안된다. 아픈 역사를 견뎌 낸 치유의 노래이고, 고개를 넘는 힘의 노래이고, 그래서 아리랑은 서사민요인 것이다. www.arirangsong.com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쇄하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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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지마 아리랑②]"삼별초·홍길동, 오키나와에 아라리 전파했다"인쇄하기 닫기 국제 > 아시아/대양주 [아카지마 아리랑②]"삼별초·홍길동, 오키나와에 아라리 전파했다" 등록 2015-02-16 16:21:29 | 수정 2016-12-28 14:35:25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지마(阿嘉島)를 찾았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오키나와=뉴시스】김연갑 상임이사·사단법인 한겨레아리랑연합회 = 일본의 고대 음악·무용 연구서인「가무음악약사」(歌舞音樂略史)는 일본의 고대 답가(踏歌) 밭매는 소리 ‘아라리’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놀라운 기록이다. 아라리의 교류를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류큐(琉球)의 밭매는 소리 아라리는 류쿠어로 ‘새가 소리를 내다’ 또는 새가 ‘울다(鳴)’라는 의미인데, 조선에서 전해진 것이다.” 이렇게 우리 ‘아라리’는 오키나와((琉球国 Rūchū kuku 1429~1879)와 닿고 있다. 이 ‘아라리’의 오키나와 전파는 우리와의 역사적 교류가 깊음을 알게 한다. 아라리는 청동기 후기 쯤, 육로와 해로를 통해 소금길이 열린 백두대간 강원·경북 일대에 예·맥·한족(濊貊韓族)의 결합 종족이 정착하여 살기 시작하면서 단조로운 몇 마디 말을 단순한 리듬에 얹어 반복적으로 되풀이하다 리듬을 형성하고, 주술성(呪術性)과 신호성(信號性)을 담아 부르기 시작한 것으로부터 형성된 노래다. 곧 산의 반향음인 ‘메(山)아리’로서 산신(山神)의 화답으로 인식하여 확산되며 불렸다. ‘아~리~’ 또는 ‘아~라~리’를 되풀이한 것이고, 이 ‘아리’ 또는 ‘아라리’는 원초적이고 단순한 ‘소리’·‘노래’·‘말’의 뜻이었다. 이를 구체적으로 부연하면 ‘옹+아리’(어린 아이 말 배우는 ‘소리’), ‘벙+어리’(‘말’ 하지 못하는 사람), ‘뫼(메)+아리’(산+‘반향음’), ‘아니리’(판소리의 ‘말’로 하는 형식)라는 례(例)에서 확인된다. 이 ‘아리’ 또는 ‘아라리’가 세월이 흘러 한국인이 좋아하는 ‘ㅏ’·‘l'·'ㄹ’음에 ‘o'(ŋ)음이 첨가되어 롱·렁·성·랑 등과 결합하여 오늘의 ‘아리랑’이 된 것이니, ‘아라리’는 17세에 들어서기 전의 명칭이다. 오늘날 강원·경상지역 음악적 특징을 말할 때 ‘메나리토리’라고 한다. 이 때 <메나리>는 강원·경상지역 김매기하는 소리인데, 구성음은 상행 선율에서는 미·라·도·레·미이며, 하행 선율에서는 미·레·도·라·솔·미이다. 선율의 골격음은 미·라·도의 3음이다. 결국 ①김매기 소리 곡명 ‘메나리’⟶ ②강원·경상지역 ‘아라리’⟶ ③아라리의 통속화로 ‘아리랑’이 된 것으로, 기층성의 경고함으로 오늘날 그 경과적 명칭이 확인이 된다. 그러므로 오키나와에 전파된 아라리는 ②강원·경상지역 ‘아라리’ 단계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즉, 적어도 17세기 이전에 전파된 것이 된다. 구비전승체인 노래의 인류문화학적 전파계기는 집단이주(集團移住)이다. 이주해서도 일정 규모로 집단을 이뤄 이주지에 흡수 동화되지 않을 정도의 영향력을 갖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라리는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떤 계기로 전파되었을까? 이를 추적하는데는 문헌기록, 유물, 설화 등에서 단서를 찾아야 하는데,「고려사」에는 첫 공식 교류가 1389년 유구국의 중산왕 찰도가 사신을 파견해 조공을 바쳤다고 했다. 조선시대「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 말기까지 수십 차례 사절을 파견하여 진귀한 물산을 바치고 표류자들을 교환했다고 하며, 세조 3년(1457)부터 순조 32년(1831)까지 약 400년간 20여 차례의 표류 기록이 확인된다. 제주도와 류큐국 사이 무수한 표류민 송환 기록이 실려 있고, 드물게 진도에 표류해온 유구국 사람들을 중국으로 보내 현지 유구국 사절에 넘겼다는 기록도 전한다. 「난중잡록」(亂中雜錄) 선조 23년(1590) 조에는 “유구국 사람 요우 등이 표류하여 본국 해변에 닿아서 관원을 보내어 그들을 요동으로 돌려 보냈다”라고 했다. 이 사실은 6년 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민여경이 유구국 사신으로부터 서찰을 받아 임금에게 올렸다. “이웃 나라와 우호를 도탑게 하고 후의에 보답하기 위해 글을 올립니다. 한 천지간에 살고 있으나 땅이 남북으로 떨어져 있으니 비록 한 장소에 모여 만나지는 못하나 실로 가슴속 깊이 사모하고 이 정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만력 18년에 본국에 소속된 요우 등이 쌀과 포를 운반하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되어 귀국의 해안에 도착하였는데, 유구의 백성인 것을 조사해 알고는 후하게 구휼하여 요동으로 보내어 북경으로 나아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해 주시어 온 나라 신하와 백성들이 공덕을 칭송하였습니다. 후면에 기록된 비단과 보물을 공손히 사자에게 부탁하여 가지고 돌아가 바치게 하여 조그마한 정성을 표시하나이다.”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지마(阿嘉島)에 도착, 현지 주민에게 아리랑 음반을 전달했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이후 수많은 표류자 처리가 양국 기록에 빈번히 나타난다. 해석상으로 유구국은 중국(명과 청)과 조선에 조공했던 나라로서 국제외교상 우호적인 교린관계를 유지한 ‘적례국’으로 간주됐다. 그래서 표류해 들어온 상대 국민을 자기네 백성처럼 후대한 뒤 송환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거리는 떨어져 있어도 해류 때문에 표류자가 많았고, 숱한 표류자 송환 교섭으로 더욱 가까워지는 사이가 되었다. 실제 태조 1394년 세력 간 다툼으로 쫓겨난 남산왕이 조선으로 정치적 망명을 하고, 중산왕이 송환을 요구하는 기사도「조선왕조실록」에 있다.(조선은 송환을 거부하고 남산왕은 4년 뒤 병사했다) 그런데 실록의 임진왜란 관련 기사는 유구국과의 관계를 되돌아보게 한다. 조선침략을 준비하던 일본은 유구와 규슈 남쪽의 사쓰마 번(현 가고시마)을 통해 군량미 비축과 군사적 도움을 요구했다. 그러나 유구왕은 단박에 거절하고, 왕을 책봉해 준 명나라 조정에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란 정보를 전해준다. 일본이 조선에서 쫓겨 간 뒤에도 사쓰마번은 에도 막부와 명나라의 화평 중재를 유구국에 요구했으나, 유구국은 다시 거부한다. 그러자 사쓰마번은 보복을 했다. 무력 침공을 당해 오키나와 열도의 위쪽 부분을 빼앗기고 사실상 유구국은 일본에 복속되는 길을 걷게 된다. 이로부터 우리와의 공식 교류는 끊어지고, 표류민 송환만 되풀이됐다. 그런데 2007년 국립제주박물관에서 개최된 오키나와 해양유물 특별전 <탐라와 유구왕국>(7월17일~8월26일)이란 전시회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이 확인되었다. 오키나와에서 온 출토품인 옛 기와 수막새가 전남 진도 용장성 출토품인 13세기 고려시대 수막새 기와 두 쪽과 같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이 유물은 이미 오키나와 열도 곳곳에서 일본 본토, 중국계와 전혀 다른 문양과 형태를 지닌 고려계 수막새, 암막새가 잇따라 성터 왕릉지에서 출토됐고 결정적으로 옛 유구국 임금의 무덤 속 건물에 쓰였던 암기와에서 ‘계유년고려장인와장조’(癸酉年高麗匠人瓦匠造)란 글 명문이 확인된 것이니 놀라움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오키나와에서 출토된 13세기 고려 명문 기와! 이 기와가 고려 삼별초 군이 쌓은 진도 용장산성 출토 기와와 같다? 이 시기 우리나라에서 오키나와에 집단적인 이주가 있었다? 이주를 할 수밖에 없는 특수 집단이다? 이 의문에서 떠오르는 것은 삼별초와 이들의 집단이주이다. 그동안 우리는 삼별초 최후에 대해「고려사」의 내용을 의심해 왔다. 즉, 지금까지 교과서는 삼별초가 800여년 전 몽골 침략군에 끝까지 싸우다 1271년 진도에서 배중손이 진압되고, 잔여 세력이 제주도로 갔으나 1273년 김통적 세력마저 소탕되어 진압되었다고 했다. 우리가 가슴 속에 지녀 온 삼별초란 누구인가? 민족의 전사, 야습(夜襲)·복병(伏兵)·협격(俠擊)의 빨치산 역사 원조, 고려 무장 사병집단이 아닌가? 이런 삼별초군이 진압당하여 흔적도 없이 섬멸되었다? 이는 믿기지 않는 기록이고,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계유년(1273)에 제주도에서 탈출한 삼별초군이 상당수 오키나와에 표착해 세력을 형성했다는 것이 된다. 표류기록을 통해 추정하면 제주도에서 해류를 타면 갈 수 있는 곳은 규슈와 오키나와다. 동서로 1000㎞에 달하는 오키나와 열도는 제주도 남쪽으로 평균 780~800㎞ 떨어져 있다. 유속이 빠른 해류를 타면 보통 열흘에서 보름, 빠르면 일주일 안에 제주에서 오키나와에 도달한다. 이 뱃길을 이 시기에 건너가 새로운 삶을 꾸렸을 집단은 바로 삼별초군이 아닐 수 없다. 주목되는 것은 삼별초군의 조력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았으리라고 보는 구스쿠라 같은 큰 성의 축성과 비로소 본격적인 국가체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인구도 적고 범위가 작은 섬에서 성을 쌓고 경쟁했다는 사실은 축성술과 전쟁술에 능한 외부 세력에 자극을 받은 결과로 본다. 왜냐하면 유구국의 역사 시대는 800년부터라고는 하나 류구국 사서에 나오는 왕조 정사는 13세기 이후부터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3세기 이전에는 이런 기반이 미약했다는 것으로. 자극을 준 이들과 기술을 전해준 이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들이 바로 삼별초군이라는 것이다.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아카지마 주민들은 이곳을 아리랑고개라고 부른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한이 서린 언덕이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삼별초군의 오키나와 이주, 이는 우리 역사에서 보여지는 극적인 엑소더스(Exodus)요, 디아스포라(Diaspora)이다. 엑소더스나 디아스포라는 분노(憤怒)와 한(恨)의 분출이니, 진도와 제주의 역사나 삼별초의 존재는 섬나라로, 본토와 격리된 섬의 운명, 오키나와의 운명과 다르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키나와로 간 삼별초군의 인적구성은 어떠한가? 삼별초는 무신들의 사병으로 시작되어 고려-몽골 전쟁이 끝나 대몽강화(對蒙講和)가 이뤄지자 조정에 의한 해체 위기에 원나라에 입조하고 돌아 온 원종이 마치 몽고군이 파견한 식민지 담당 총독처럼 행세하는 것에 반발하여 배중손을 우두머리로 하여 몽골(원나라)과 고려 왕조에 대항하였다. 삼별초가 난을 일으킨 것이다. 이후 왕족 승화후 온(昇化候 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관부(官府)를 설치하여 반몽정권(反蒙政權)을 수립했다. 일부 노비와 개경으로 가지 않은 귀족들이 참여하여 1000여 함선을 징발, 진도(珍島)로 가 용장산에 행궁을 마련하고 산성을 쌓아 본거지로 삼았다. 민중들의 호응도 있었다. 경상도 밀성(밀양)의 군민들이 봉기하여 수령을 죽이고 진도 정부에 호응하였고, 개경에서는 관노가 일어나 다루가치와 고려 고위관리를 죽이고 진도 정부에 투항하였으며, 경기도 대부도(大部島) 주민들은 몽고인 6인을 죽이고 진도 정부와 연결하고자 하였다. 이렇듯 ‘진도 정부’가 위세를 크게 떨치게 되자 멀고 가까운 여러 지방의 관원들이 진도에 들어가 고려황제 온을 알현하려고할 정도였다 이후 3년간 항쟁하다 배중손과 승화후 온이 남도석성에서 전사했다. 이로써 김통정이 우두머리가 되어 제주도로 가 1273년까지 고려·몽골 연합군과 항전하다 일본정벌 정책을 준비한 1만여 여·몽 연합군의 화약무기 공격으로 크게 패했다. 항파두리 북쪽 바굼지(破軍峰)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3년 간의 대몽항쟁은 외세 침략에 대해 완강하게 저항한 호국 항쟁의 영웅적 활동이었다. 각 계층의 사람들이 대열에 참여했고, 대다수가 저항의식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이 제주에서 진압되었다 해도 이들의 성향은 어떤 형태로든 나타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잔족 세력의 최후와 처리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이는 완전한 진압의 결과가 아니라 집단이주의 결과일 것이다. 이러한 삼별초군의 오키나와 집단이주는 축성술과 전투술과 기와 제작술 뿐만 아니라 아라리도 전파시켰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오키나와에 집단이주한 이들은 삼별초군 만이었을까? 또 있다. 춘향전 연구의 대가인 연세대 설성경 교수는 “단 한 줄의 문장을 위해 두 권의 논문집을 냈다”고 했다. 그 단 한 줄의 문장은 바로 “홍길동이 오키나와에 갔다”이다. 실존인물 홍길동이 오키나와로 건너갔다는 주장이다. 홍길동(洪吉童 洪吉同 1440~1510)은 전남 장성군 황용면 아차실(亞次谷)에서 홍상직(洪尙直)과 관기 옥영향(玉英香 소설에는 관비 춘섬) 사이에서 난 서자로, 1500년까지 충청도 공주 무성산(公州 茂盛山)을 근거지로 의협(義俠) 활동을 한 인물이다. 소설에서는 불합리한 서얼 차별과 백성에 대한 가혹한 수취, 국방에 대한 부실 등의 개혁을 주장하였고, 국왕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로지 백성이라 역설하였다. 허균(許筠 1569-1618)은 백성을 현실에 순응하는 항민, 불만이 쌓인 원민, 사회를 바꾸기 위해 직접 나서는 호민으로 나누었으며, 홍길동을 호민이라고 하였다. 주인공을 집권층에 항거한 의적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왕조실록태백산 사고본 연산 6년(1500) 10월22일조는 다음과 같다. “듣건대, 강도 홍길동(洪吉同)을 잡았다 하니 기쁨을 견딜 수 없습니다. 백성을 위하여 해독을 제거하는 일이 이보다 큰 것이 없으니, 청컨대 이 시기에 그 무리들을 다 잡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좇았다.”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지마(阿嘉島)에 도착, 현지 주민에게 아리랑 음반을 전달했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홍길동이 정3품 당상관인 첨지중추부사를 자칭하며 무리를 이끌고 관가에 들어가 기탄없이 강도 행각을 했다며, 조정은 홍길동에게 강상죄를 적용하였다. 더불어 조정은 홍길동의 이러한 행동이 지방 관리와 유향소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해를 넘긴 1501년까지 관련자를 잡아 국문하였다. 홍길동을 도운 죄로 잡힌 지방 관리 엄귀순은 끝까지 국문에 승복하지 않았다가 옥사하기도 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는 홍길동을 잡았다는 기사 이외에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한 기사가 없다. 이익의「성호사설」에서도 조선 시대의 3대 도둑으로 장길산, 임꺽정과 함께 홍길동을 논하면서 이들의 이름이 장사꾼이 맹세하는 구호에까지 들어와 있다고만 적고 있다.「연산군일기」가 시대 상황으로 인해 일부 누락된 부분이 있다고는 하나 다른 기록이 상세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런 기록 태도는 강상죄목으로 구금되었다가 최후를 맞았거나 탈옥을 했으리라는 추측을 하게 하는 것이다. 최근의 홍길동 연구 결과는 홍길동이 조선에서 죽은 흔적이 없고, 이후 야사나 소설에서는 홍길동의 해외 출국의 이야기를 직접 또는 암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 이유는 첫째, 1500년 홍길동의 의금부 체포 당시는 가뭄으로 도둑들의 피해가 크게 늘어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공물을 감해주고, 감옥의 죄수들을 석방시키는 대책을 세웠다. 홍길동 집단을 해외 이주시키는 선택을 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둘째는 1500년에 유구왕 상진(尙眞)이 조선에 사신을 보내어 빙례(聘禮)를 올리고 토산품을 바치면서 대장경(大藏經)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는 성희안(成希顔)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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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지마 아리랑⑤]일본의 사죄, 오카모토 ‘분야 아리랑’인쇄하기 닫기 사회 > 사회일반 [아카지마 아리랑⑤]일본의 사죄, 오카모토 ‘분야 아리랑’ 등록 2015-02-16 16:20:11 | 수정 2016-12-28 14:35:25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 섬의 아리랑고개를 찾았다. 현지 주민들에게 아리랑 음반을 전달했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오키나와=뉴시스】김연갑 상임이사·사단법인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오카모토 분야(岡本文彌)의 신나이 부시(新內節 sinnai busi) ‘분야 아리랑’이 있다. 1992년 일본 전통 창(唱) 장르인 신나이부시 기능보유자 오카모토 분야(1895~1999)가 97세에 창작, 공연한 작품이다. ‘종군 위안부 사죄의 노래’란 부제가 알려주듯 의미있는 작품이다. 1992년 전국 순회공연 중 당국의 제지로 더 이상 연주되지 못했다. ‘신나이부시’란 1700년대 말 성행한 일본 전통 창으로 당시 무사계층에서 향유되다 차츰 서민들에게 확대되어 오늘에 이른 장르이다. 오카모토 분야는 1957년 기능보유자로 지정받아 활동하다 103세인 1999년 작고했다. 일본 내 저항적인 예인으로 활동했다. 1968년 ‘시주호쇼’상을 수상하는 등 이 분야에서 명성을 떨쳤다. 소화(昭和) 초기 ‘짖어라 백성이여’로부터 많은 작품을 지어 불렀고 ‘나의 아리랑’은 1992년 작이다. 오카모토는 “1940년대 초 조선방송협회(JODK·현KBS) 출연을 위해 방한한 바 있는데 당시 남대문에 있는 한 요릿집에서 이수정(李水晶)이란 기생으로부터 아리랑을 듣게 되어 그 정감을 내내 잊지 못했다. 그러던 터에 일본 정부가 정신대(위안부) 문제를 정정당당하게 처리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나라도 이 문제에 용서를 빌어야 한다는 마음을 갖게 되어 그 사죄의 마음을 아리랑에 연결하여 지은 것”이라고 했다. 위안부의 한스런 회한을 1인칭으로 하여 시작하는 창은 역시 한·일 관계사의 구체적인 증언이 아닐 수 없다.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 섬의 조선인 위안부 숙소를 찾았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분야 아리랑 (내레이션) 나는 1940년 16세 때 조선학교에서 담임인 일본인 교사와 함께 경찰서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헌병에게 ‘위로부터의 명령이다. 명령에 거역하면 죽을 줄 알라’고 협박을 받아 몸이 더렵혀진 위안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셀 수도 없는 수많은 일본 병사들에게 몸과 마음이 갈기갈기 찢겨 저의 인생은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결혼할 수 없고 아이도 낳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그 누구 때문에 제가 이렇게 비참하게 되어 버렸단 말입니까? 밉습니다! 분합니다! 밉습니다! 분합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노래) 아리랑 고개 한가운데에서 나아갈까 되돌아갈까 망설이며 울었습니다. 고개를 넘으면 바로 고향 땅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이시여. 귀여운 남동생이 그곳에 있소. 사랑스런 여동생도 기다리고 있소. 만나고픈 심정은 산과 같으나 이런 비참한 몸으로 어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요. 한밤의 별이 밝게 빛나건만 이 내 가슴 고통은 가실 길 모르오. 밤하늘의 기러기는 어디로 가나. 나의 님은 어디에. 나만 남아 있는 이 타국 땅. 남쪽 나라까지 손을 뻗어. 처녀 여인 분별없이 붙잡혀서 얼굴도 모를 ‘병사’에게 먹이가 되어. 무정비도(無情非道)의 반복이었소. 모르는 척 하는 게 그 어느 나라 도리인가요. 천 년 만 년 조약돌이 바위가 되어, 그 바위에 이끼가 낄 때까지. 이 분함은 잊을 길이 없다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오카모토 분야 창·김경원 역)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 섬의 아리랑고개를 찾아 한국인 위안부들의 넋을 달래고 나하 항으로 돌아왔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이 아리랑은 일본 속의 아리랑 중 매우 특이하고 아리랑다운 작품이다. 한일관계 상에서만 있을 수 있는 의미있는 일본 음악인의 용서와 사죄의 아리랑이다. www.arirangsong.com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쇄하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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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아카지마아리랑 기사모움뉴시스2015.01.29.네이버뉴스 "왜 우리는 일본의 아카지마 아리랑 고개로 가는가" 【서울=뉴시스】아카지마아리랑평화음악제 추진단이 문경새재를 찾았다. 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 송옥자 회장과 회원들, 아리랑홍보대사 송미진, 문경아리랑경창대회 최연소 수상자 박주빈(당시 3세), 상여소리 명창... 뉴시스2015.02.16.네이버뉴스 [아카지마 아리랑⑥]그 이름 아리랑, 인류보편 ‘고난의 메타포’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 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지마(阿嘉島)의 아리랑고개를 찾아 위령제를 올렸다. 유일한 20대 단원 송미진씨가 당시 위안부 숙소 앞에서 오열했다. 사진... 뉴시스2015.02.13.네이버뉴스 [아카지마 아리랑③]일본으로 끌려간 한국남녀, 군부·위안부 아리랑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 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지마(阿嘉島)의 아리랑고개를 찾아 한국인 위안부들의 넋을 달랬다. 이어 나하(那覇)로 돌아와 평화로서의 아리랑을 논했다.... 뉴시스2015.02.14.네이버뉴스 [아카지마 아리랑④]일제 음반으로 아리랑 접한 미군, 아이러니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 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지마(阿嘉島)의 아리랑고개를 찾았다. 일본 제국주의에 희생당한 한국인 위안부들의 영혼을 위로했다. 사진= 엄문희... 뉴시스2015.02.14.네이버뉴스[신동립 잡기노트]경북문경·日오키나와, 슬픈 평화…‘아리랑’ 뉴시스2015.02.12.네이버뉴스 [아카지마 아리랑②]"삼별초·홍길동, 오키나와에 아라리 전파했다"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 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지마(阿嘉島)를 찾았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오키나와=뉴시스】 김연갑 상임이사·사단법인 한겨레아리랑연합회... 뉴시스2015.02.15.네이버뉴스 [아카지마 아리랑⑤]일본의 사죄, 오카모토 ‘분야 아리랑’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 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 섬의 아리랑고개를 찾았다. 현지 주민들에게 아리랑 음반을 전달했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오키나와=뉴시스】김연갑... 뉴시스2015.02.06.네이버뉴스 7세 박주빈·25세 송미진, 日아카지마 아리랑평화음악제 합류 까닭 【서울=뉴시스】 기미양 단장·아카지마아리랑평화음악제 추진단 = ‘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이 9일 오키나와로 간다. 역사적으로, 음악사적으로, 설화적 관계로, 그리고 미군위문협회(USO) 아리랑... 뉴시스2015.02.11.네이버뉴스 [아카지마 아리랑①]누가 서정민요라 했는가, 통곡의 아리랑 【서울=뉴시스】일본 오키나와 현 미야코지마 시의 아리랑비 인조(1623~1649) 때 왜인(倭人)이 유구를 침략해서 그 왕을 잡아 갔다. 이에 왕세자가 보물을 갖고 왜(倭)에 들어가 부왕(父王)을 풀어 달라고 떠났는데 배가... 제주의소리2010.03.22. 일본 아카지마 '아리랑 고개'서 부르는 평화의 노래 1945년, 일본 아카지마섬 '아리랑 고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한 무리의 여인들이 고개를 넘다말고 먼 바다를 바라본다. '저기 어디메쯤이 내 고향이겠지...' 이들이 바라본 곳은 현해탄 너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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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지마 아리랑①]누가 서정민요라 했는가, 통곡의 아리랑인쇄하기 닫기 사회 > 사회일반 [아카지마 아리랑①]누가 서정민요라 했는가, 통곡의 아리랑 등록 2015-02-16 16:21:54 | 수정 2016-12-28 14:35:26 【오키나와=뉴시스】평화의 초석.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오키나와=뉴시스】김연갑 상임이사·사단법인 한겨레아리랑연합회 #1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외침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 “오시비앵침(폴란드)에서 살아남은 우리는 결코 우리의 과거가 아이들의 미래가 돼선 안 된다고 결의한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해방 70년을 맞았다.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유태인을 비롯한 정치범, 전쟁 포로 등에 대한 집단 학살)를 자행한 곳인데, 1945년 1월 27일 옛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어 1947년 박물관으로 개관되어 처참한 히틀러의 만행을 기록하고 있다. 이 박물관 입구에 쓰인 경구(警句)가 바로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 된다’이다. 오늘의 우리가 역사유적지를 답사하는 이유가 이 경구를 실천하기 위해서 이다. 두 번째 인용문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박물관 앞에서 한 말이다. 아마도 이 오키나와에 세워진 위령탑이나 기념비를 세운 분들도 같은 말을 하였을 것이다. 가해든 피해든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결의의 징표가 바로 이런 박물관이고 기념표식이기에 이를 건립하며 똑같은 염원을 표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홀로코스트가 얼마나 참혹하고, 반인륜적(反人倫的)이었던가를 극명하게 표현한 말이다. 지옥 상항을 벌린 인간들이 무슨 염치로 사랑을, 평화를, 꿈을 이야기 할 자격이 있느냐라는 엄중한 질책이다. 이제 시인은 이를 반성하고 속죄하는 역사기록으로서의 서사시를 써야 한다는 자성이다. 독일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깊은 자성을 우리도 이곳 오키나와에서 엄숙하게 수용해야 한다. 【오키나와=뉴시스】평화기념공원.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1944년 일본해군 ‘특설수상근무대’(特設水上勤務隊)로 끌려온 350명의 조선인 군부 우리 오빠 형들이 일본군의 교쿠사이(玉碎)로, 폭약을 묶어 미군 전차로 밀어 넣어 죽고, 미군의 폭격에 죽었고, 52명의 종군 위안부 우리 누이 언니들이 위안소에서 또한 요나구니지마 구부라항 이동 중인 배 안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죽었다. 이들이 바다 건너 조선을 그리며 불렀던 노래가 아리랑이었음을 확인한 우리도 이제는 더 이상 아리랑을 서정민요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오키나와에 세워진 위령탑마다 조선인 희생자의 수는 다르다. 더욱이 오랜 세월이 지난 2010년대에 들어 동북아역사재단이 조사한 증언·공문서 등 각종문서 상세조사에 의한「일본군 위안소 지도」에 의하면 오키나와에서 채록한 증언과 기록만으로도 237명이 산출되었으니 이 섬에서의 우리 아리랑은 통곡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2 1970년 7월 8일, 도쿄타워 인질 사건 “나는 우치난추 도미무라 준이치다. 20세 이하 청소년은 풀어주겠다. 조선인과 우치난추는 풀어주겠다. 하지만 미국인과 일본인은 풀어주지 않겠다. 미국과 일본은 오키나와 문제에 참견하지 말라. 천황은 사죄하라!” ‘일본인들이여, 오키나와 문제에 개입하지 말라!’라는 문구가 쓰인 티셔츠를 입은 도미무라 준이치(富村順一)가 칼 두 자루를 들고 도쿄타워에 들어가 미국인 선교사의 목에 대고 외친 말이다. 1930년 오키나와에서 태어났고, 1940년 천황 사진에 대한 경례를 거부, 소학교에서 쫓겨났고, 1954년에는 나하(那覇) 형무소 폭동에 참가했으며, 1955년에 일본 본토로 건너와 각종 운동에 참가했고, 오키나와 조선인 희생자 위령탑 건설 운동에 참가한 인물이다. ‘야마톤추’(일본인이라는 오키나와 말)에게 ‘우치난추’(오키나와 사람을 뜻하는 오키나와 말)의 통한을 외친 인물이다. 그런데 이 사람의 외침 속에 ‘조선인’이 들어 있다. 우치난추의 통한과 오키나와에 있었던 조선인(일본군 군부·군속·위안부)들의 통한을 일본인들에게 전한 것이다. 우리를 대신해서! 그리고 오키나와에 건립된 <아리랑비>, <조선인 희생자위령탑> 등 건립을 추동하였다. 이 외침은 동서 1000㎞ 남북 400㎞ 해역에 160여개의 섬(유인도는 약 50개)으로 구성된 류큐(琉球) 왕국(1429년 호족세력 통합-일본·중국·조선 중개무역국)을1879년 일본 사쓰마번이 강제합병(1차 유쿠처분)시키고, 1872년 일본 야마토(大和)정부가 통합하여 식민지로 만들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군의 일본 본토 육상전을 저지시키는 사석(捨石戰)의 희생양으로 삼았고, 1945년 종전 후에 미국 군정으로 넘기고, 1972년에는 일본에 흡수하면서도 미군기지로 남겨둔 것에 대한 항변이다. 【오키나와=뉴시스】히메유리의 탑.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우리도 1905년 보호조약을 맺어 외교권을 제한하고 1910년 합병시켜 45년까지 식민지화 하여 수탈하고, 3년간 미군정을 실시하게 했고, 1948년 분단을 시킨 것이 일본이니 같은 처지였다. 그래서인지 이승만 대통령이 1956년 강영훈 육군소장에게 이런 말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오키나와에 들러 따끔하게 독립정신을 일깨워 줄 필요가 있네. 오키나와가 원래 대한민국과는 가까운 사이였는데, 이 사람들이 또 일본 치하에서 살려고 그러는 모양일세. 그들에게 우리의 예를 들면서 독립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쳐주게.” 이런 지시는 고려시대로부터 조선시대 실록에 기록된 역사적 관계를 어느 정도는 이해한 발언이긴 하다. 그러나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동정어린 발언이기 보다는 불완전한 독립을 마치 완전한 독립인 것처럼 거만함이 묻어있다. #3 ‘미안하오 유구왕자여 슬프구나’(哀哉悲夫 琉球世子之事)『동야휘집』·『광해군일기』·『인조실록』·『택리지』·『연려실기술』·『열하일기』, 그리고 『담옹유고(藫翁遺藁)』같은 야담집이나 실록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유구국 왕자의 슬픈 죽음에 대한 것으로 김려(金鑢)가 담옹유고에 기록한 <유구왕세자외전>이 그것이다. 김려는 <미안하오, 유구 옹세자여! 정말 미안하오>(哀哉悲夫. 琉球世子之事. 悲夫哀哉)라는 제목으로 애도의 글을 남겼다. 인조(1623~1649) 때 왜인(倭人)이 유구를 침략해서 그 왕을 잡아 갔다. 이에 왕세자가 보물을 갖고 왜(倭)에 들어가 부왕(父王)을 풀어 달라고 떠났는데 배가 표류하였다. 표착지는 제주 바닷가. 이 사실을 안 제주목사(濟州牧使) 이기빈(李其賓) 또는이란(李灤)은 배 안을 정탐하고 흰 앵무새 1쌍, 수정 알 2매(枚)의 보물과 술을 만드는 돌(酒泉石)이 있어 욕심이 났다. 4각의 돌에는 구멍이 있는데 여기에 물을 부으면 술이 되는 신기한 물건이고, 앵무새는 왼 발톱으로 비파를 켤 수 있다고 했고, 수정 알은 밤에 환하게 빛을 낸다는 것을 알았다. 이란은 왕자에게 요구했다. 이 보물들을 주면 유국구으로 돌려보내주겠다고. 그러자 왕자는 눈물로 호소했다. 【서울=뉴시스】일본 오키나와 현 미야코지마 시의 아리랑비 “내가 보물을 아끼는 것이 아닙니다. 부왕께서 힘없이 붙잡혀 갇혀 계셔서 보물이 없으면 부왕을 풀어 달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치욕은 이웃 나라의 치욕과 같으니, 원컨대 대부(大夫)는 이를 슬퍼하소서.” 이에 이란은 세 번씩이나 보물을 달라고 요청했다. 그래도 왕자는 눈물로 사정을 했다. 그리고 왕자는 이란의 욕심으로는 물건을 주지 않으면 보내지 않을 것을 알고 그럴 바에는 죽음을 무릅써야 한다고 각오하고 혈서를 썼다. 절명시(絶命詩)인 것이다. “세 어진에 순장(殉葬)을 대속(代贖)할 이 누구인가/ 두 아들 배를 탈 때 도적이 불인(不仁)했도다/ 모래벌판 해골에 잡초가 얽히리니/ 이내 혼 고국(古國) 간들 슬퍼할 친지 있을까/ 제주도 앞 바닷물은 도도하게 흐르고/ 남은 원한 선명하여 만 년간 오열하리.” 기어이 이란은 보물을 빼앗으려고 배를 포위했고, 위협에서 왕저의 보물을 보호하려는 종자 한 명은 돌을 끌어안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이에 이란의 수군은 이를 빼앗으려 달려들고 배안을 급습하여 모든 보물을 약탈했다. 그리고도 부족하여 13명의 시종과 왕자까지도 죽이고 말았다. 이란은 조정에 왕자의 배가 국경을 침범한 도적이라고 속여 아뢰었고, 강탈한 재물을 모두 소유했다. 그러나 앵무새가 땅을 밟자마자 죽는가 하면 진귀한 보물이 있다는 소문이 퍼져 결국 발각되고 말았다. 그러나 체포된 이란은 큰 벌도 받지 않고 방면되었다. 이 사실은 많은 문인들에게 유구국의 부왕과 왕자를 애도하는 글을 쓰게 했다. 대표적인 글이 김려가 쓴 글로 <미안하오 유구왕자여>가 있다. 이 번역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슬프고 슬프구나. 유구 세자의 일이 슬프고 슬프구나. 세상에는 ‘세자가 작은 보물을 아껴 위로 임금을 맞이하지 못했고, 아래로 자신을 보전하지 못했으니 족히 일컬을 데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지나친 말이다. 이란의 형세를 보건대 보물을 주었어도 죽었고 보물을 주지 않았어도 죽었을 것이다. 똑같이 죽는 것인데 하필 보물을 주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세자처럼 효성스럽고 인자하고 명철한 사람이 어찌 차마 보물을 중요하게 여기고 자신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겠는가. 하물며 자신이 살면 임금을 맞이할 수 있고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음에랴! 그러나 세자는 반드시 여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무릇 이란의 죄는 세 가지이다. 재물을 탐내 사람을 죽인 것이 첫 번째이다. 이웃 나라와의 외교를 망가뜨린 것이 두 번째이다. 임금을 속인 것이 세 번째이다. 신하가 이 가운데 한 가지 죄라도 있으면 마땅히 형을 받아 죽어야 하거늘 당시 군자가 그 죄를 성토하는 말을 한 마디도 내지 않아 포악한 난신(亂臣)이 편안히 복을 누리고 자손이 부귀영화를 누렸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유구 사람이 군사를 일으켜 바다 건너 서쪽을 향해 두 임금의 원수를 갚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장차 어떤 말로 대답할 것인가? 이란의 인육을 먹는 것으로 충분한 일인가? 단지 다행히 유구가 나라가 작고 힘이 약하며 또 바야흐로 왜놈의 난리 때문에 여기에 미칠 겨를이 없었던 것뿐이다. 이로부터 유구의 통신사가 끊어졌으니, 아, 이웃 나라에 들려 줄 이야기가 아니다.” 1612년 사헌부 기록과「조선왕조실록」제27권 <광해군일기> 2월조에도 있고, 얼마나 애석했던지 지리서인「택리지」제주 대목에도 인용되어 있다. 와전되어 설화적인 요소가 보이긴 하지만 왕자의 제주 표착과 애절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죽이고 재물을 취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이후 우리 조정은 유구국 표류자에 대해서는 어명으로 편의를 봐주는 조치를 취했지만, 외교상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이는 우리가 유구에 진 여러 빚 중에 가장 큰 빚이다. 바로 김려의 위의 글은 분명 이 빚을 후손들이 꼭 갚길 바라는 마음에서 남긴 것일 것이다. 【서울=뉴시스】김연갑, 아리랑 권위자 역사에 대한 미안함을 갖는 것, 선린을 추구하는 진정한 자세이며 외교상 지성사의 전통이 아닌가?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는 창조되는 것이 아닌가? #4 아라리의 고려말 확산 “이 노래는 정선아리랑의 시원을 이루는 노래로서 지금으로부터 580년 전 고려조가 망하게 되자 이제까지 관직에 있던 선비들이 이를 비관하고 송도(松都 개성의 고려 수도)에서 두문불출 은신하다가 정선에 숨어들어 지금의 거칠현동(居七賢洞)과 백이산(伯夷山)을 소요하면서, 이제까지 섬기던 고려왕조가 그냥 망하고 말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다시 계승될 것인지, 송도에는 험악한 먹구름이 모여드는 시운을 한탄하고 쓰라린 회포를 달래며 부른 노래이고, 대사는 이러한 때가 아니라면 자기들이 모든 것을 등지고 쓸쓸한 이 산중에서 울부짖으며 살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심정을 읊은 것이다. 정선아리랑의 가락이 구슬프고 구성진 곡조를 지닌 것은 이런 한탄과 시름을 읊조리게 된데 연유한 것이다. 본래는 ‘아라리’(我羅理)라고 일컫던 것이 세월이 흘러감에 어느새 보편적인 아리랑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으니 아리랑이란 누가 나의 처지와 심정을 ‘알리’에서 연유된 듯하더라. 당시 몇몇의 고려유신과 함께 거칠현동과 백이산에서 고려조를 위한 충의로웠던 마음씨를 읊은 칠현들의 시는 지금까지 전하여지고 있다.” <정선아리랑비> 음기(陰記)의 일부이다. 강원도 정선군에서 발행되는 모든 자료에 유사하게 전해지는 내용이다. 고려말 상황으로 이성계의 혁명으로 조선이 건국되자 이에 불복하여 관직에 오르지 않고, 충절을 지키려 정선에 은거하며 ‘누가 내 마음을 알리오’라는 신세 한탄의 시를 읊었다. ‘아라리’가 오늘의 ‘아리랑’으로 음전(音轉)되었다는 논점이 주목된다. 이상에서 제시한 네 가지 상황, 우리와 오키나와는 일본 그 이상의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관계 속에는 우리가 미안함을 가져야 사실도 있으니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 이를 전제하여 아리랑을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이를 유념하여 오키나와 속의 아리랑 층위를 살펴보기로 한다. www.arirangsong.com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쇄하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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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지마 아리랑⑥]그 이름 아리랑, 인류보편 ‘고난의 메타포’【오키나와=뉴시스】김연갑 상임이사·사단법인 한겨레아리랑연합회 = "조국의 아리랑은 나의 영혼이자 블루스, 내 몸 안의 DNA와 같다.” 교포2세 가수 아라리 에이치, 박영일(新井英一)이 한 말이다. 1994년 발표한 <청하아리랑>(清河への道~48番)이 주목을 받아 1995년 일본 레코드 상을 수상했고, tbc TV 10시 메인뉴스 테마뮤직으로 1년간 방송되었다. <청하 아리랑>은 그가 아버지의 고향인 경북 청하군(현 포항시 북구 청하면)을 방문한 뒤 작사·작곡한 작품이다. 교포2세로 차별을 받고 미군 기지에서 이국인 취급을 받은 서러움을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나는 간다”라고 강렬한 목소리로 외쳤다. 1950년부터 후쿠오카 이와쿠니 미군기지에서 접시닦이를 하다 미국행을 한 후 정체성을 지닌 노래를 해야한다는 강렬함에 부르게 된 노래다. "아리랑은 특별한 고난을 겪은 이 만이 부르는 특권을 가진 노래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자기 나름의 고난을 가진 사람, 그리고 거기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내려는 이에게 보편적으로 어필하게 하는 힘을 가진 노래다. 이런 의미에서 고난의 메타포(metaphor)로서의 아리랑은 반드시 조선이라는 공간이나 조선인이라고 하는 민족에 한정되어 있지 않은 보편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스스로의 삶을 드라마화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강력한 리소스(財源)인 것이다.” 아리랑을 연구한 일본 학자가 쓴 글의 일부이다. ‘고난의 메타포’라고 했다. 이어 교표2세들의 아리랑을 살펴본다. 바로 이들의 부친 대부분은 징용에 끌려왔다 잔류한 이들이다. 백룡의 <아리랑의 노래>는 아마도 동포2세들이 공통으로 갖는 아리랑의 정서일 것이다. "술을 드신 아버지가 부르는 노래/ 그것은 고향의 멜로디 아리랑의 노래/ 그 무엇을 그리며 부르시는 걸까/ 그 때의 현해탄 아니면 어릴 적 고향산하/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아리랑 고개로 넘어가네.” 호타루 아리랑 <특공대의 노래> 붉은 피가 샘솟는 요카레노(특공대의)/ 일곱 개의 제복단추 아침 해에 빛난다/ 오늘도 비상한다 가노야의 창공에/ 큰 희망의 부푼 구름 샘솟네 치쿠호우(筑豊) 탄광 아리랑 우리의 고향은 경상북도인데/ 나는야 어째서 숱(석탄)파러 왔느냐/ 일본땅 좋다고 누가 말했냐/ 일본땅 와보니 배고파 못살겠네/ 숱 팔 때는 배고파 못살겠네/ 이 말만 하면은 몽둥이로 맞았네/ 배가 고파요 어머니 보고 싶어요/ 눈물을 흘리면서 편지를 내었네/ 어머니 소리도 크게 못하고/ 감독이 겁나서 가만히 불렀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넘어 간다 봄 아리랑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지마(阿嘉島)의 아리랑고개를 찾아 한국인 위안부들의 넋을 달랬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영감이 어디로 가나?/ 아리랑 고향에는 살수가 없어/ 추운 만주로 쫓기어 간다/ 아리랑 아리랑 정처 없이/ 아리랑 국경을 넘어서 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동포는 무엇을 먹나?/ 아리랑 나라는 쌀의 나라/ 아리랑 동포는 좁쌀도 없다/ 무자비한 왜놈에게 빼앗기고/ 오소리 지주에게 착취당해 이런 아리랑을 부르는 재일동포는 70여만명, 부라쿠민(部落民; 천민 후예), 오키나와인에 이은 세 번째 소수자 집단이다. 천민계급이 피차별부락(被差別部落)이었다가 부락만 남았다. 아이누족, 오키나와인, 재일 한국인, 재일 중국인, 류큐인과 함께 일본 내의 대표적 소수 집단이다. 재일동포 아리랑은 이런 굴곡을 헤치고 피어난 꽃이다. 아리랑은 기존의 구비문학 또는 민요 서술의 지배 담론과는 다른 시각에서 의미체계를 구성해야 함을 일깨운다. 텍스트로서의 특정 아리랑에 대한 물음의 해답은 하나이다. 그러나 아리랑 문화로서의 물음에 대한 답은 여러 가지이다. 이 일본 속의 아리랑이 그렇다. 어찌 민요론적인 해석으로 답할 수 있는가? 역사적 전개와 맥락에서 아리랑을 조감해야 함을 실감한다. 아리랑은 전승과 창조적 계승에서 자발적이라는 사실과 역사적 지속성, 문화적 개성, 현실적 가치에서 탁월한 보편성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다른 문화유산과 다르다. 보편적이되 특수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 오키나와로부터의 아리랑은 이런 현학을 떠나 더 높은 것이어야 함을 깨우쳐 준다. 만국진량(萬國津梁), ‘만국에 열려있는 가교’, 1458년 제작된 류큐국 종(鐘)에 세겨진 경구이다. 아리랑은 만국에 열려있고, 만국을 노래해야 한다. 그래서 만국에 통해야 한다. 만국을 위해! 누치토타가라! 생명 이상의 존귀함은 없다! 이 귀한 두 경구(警句)에 아리랑이 있어야 한다. 루치난추 대대로 내려오는 이 경구는 수없는 역사적 고난을 극복하며 얻은 진리일 터, 어쩌면 우리의 피, 우리의 아라리가 담겨있을 터! 누치토타가라 아리랑! 누치토타가라 아리랑! 누치토타가라 아리랑! www.arirangso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