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아리랑인스티튜트] 서울지부장 마이클 람브라우
-
[판아리랑] 렉쳐아리랑. 해설이 있는 의병아리랑. 기연옥이 전승하는 춘천의병아리랑아리랑명창, 기연옥의 아리랑한마당 제1막: 아버지의 아리랑 춘천아리랑, 양구아리랑, 정선아리랑, 춘천논매는소리(아라리) 제2막: 나의 아리랑 춘천의병아리랑. 강원도아리랑, 한오백년, 서울제정선아리랑 제3막: 의병아리랑 춘천의병아리랑, 윤희순의병아리랑, 제천의병아리랑, 문경의병아리랑, 안녕하십니까? 오늘 진행과 해설을 맡은 아리랑을 공부하는 아리랑학회 연구이사 기미양입니다.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자리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연목적-오늘 이 무대는 명창 기연옥 회장의 후원회 결성기념 공연입니다. 기명창은 지난해 12월 <의병아리랑제>를 개최하고, 아리랑이 세계인류문화유산 등재를 기념하여 <의병아리랑> 음반을 발매했다. 이후, 후원회가 결성되어 오늘 기념공연하게 되었습니다. 기획의도- ‘아리랑한마당’ 무대가 서울 창덕궁 소극장에서 열리는 배경은 아리랑 역사와 관련하여 의미가 있는 곳이기에 이 공간을 선택하였다. ① 이 거리는 고종황제와 명성황후가 창덕궁에서 매일밤 소리패나 광대패같은 전문예인집단들을 불러서 아리랑을 들었던 곳이고, 그런 국악인들이 활동하던 지역이기도 하다. ②1926년 단성사에서부터 창덕궁까지는 영화 <아리랑>이 개봉된 길입니다. 아리랑 영화를 보려고 줄을 섰던 곳이고, 나운규 감독을 보려고 장안의 명창 명기들이 인력거를 세워놓고 기다린 곳이다. 이런 아리랑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서 창덕궁 소극장 박종철 대표님이 각 지역의 아리랑 명창을 초청하여 이루어지는 공연입니다. 이에 감사를 드립니다. 기연옥 회장 나오십시오. 명창 기연옥 회장이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박수) 먼저 내빈 소개가 있겠습니다. 축사-김연갑 이사. 후원회장, 춘천보훈청장 공연을 시작하겠습니다. (징소리) 사회자 오프닝 멘트- 공연형식-아리랑 전승상황을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해서 소리인생을 3부로 구성했고, 소리만을 듣기 위해서 음향기기를 쓰지않고, 육성만으로 공연이 된다. 그래야만 아리랑 가사가 그대로 전달되어 소통이 되고 공감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주로 대금과 징(허윤석), 피리(위재영), 타악(이승호)이 연주된다. 가까운 거리이기에 숨소리까지 들을 수가 있지요. 서양음악 공연에서는 이런 무대를 ‘하우스콘서트’라고 한다. 그래서 마을사람들과 사랑방에서 들었던 ‘삶의 소리’ 아리랑을 가슴과 가슴으로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아리랑 소리꾼으로 살아온 이야기를 통해서 한 집안에서 전승하는 아리랑이 어떻게 계승되어 오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무대입니다. 제1부가 시작되기 전에 기명창의 소리인생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제1부:아버지의 아리랑/2부:나의 아리랑/3부:의병아리랑 사회자:1부는 지역 소리꾼으로 유명한 아버지를 그리며 준비한 '아버지의 아리랑'입니다.고향인 소양강 마을과 춘천은 어떤 곳인지? 기명창: 지금은 소양감 댐으로 수몰되었지만, 고향마을은 집안잔치가 있으면 며칠전부터 기별이 오면, 전날 동내 아낙네들이나 할머니들이 음식을 가서 해주고, 당일 아침 일찍 모두 그 집으로 대접을 받으러 갑니다. 춘천은 13도의군도총재 유인석 의병장, 춘천의병장 이소응, 최초 여성의병장 윤희순이 있고, 이러한 정신을 이어서 최초로 여성예비군이 창설된 곳입니다. 사회자:부친이 ***마을의 이름난 소리꾼이셨다는데, 아버지에 대해서 기억나는 것은? 사회자: 가족이야기 좀 해주세요.형제분은 어떻게 되고, 형제분들도 노래를 잘 하시나요? 기명창: 모두 잘 부르는데, 오빠 한분이 이름난 소리꾼이었습니다. 월남전에 참전했는데 거기서도 늘 소리를 하라고 해서 전쟁터에서도 여러 소리와 아리랑을 했는데, 베트남 사람들도 아리랑을 잘 따라 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빠가 그 월남 전쟁터에서 흉탄을 맞고 귀국후 후유증으로 요절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부르는 아리랑에는 아버지와 오빠하고 같이 부르는 아리랑입니다. 사회자: 그러면 아리랑은 어떻게, 누구에게, 배워서 부르게 되었나요? 언제부터 아리랑을 알게 되었는지요? 기명창: 어릴 적부터 아리랑은 할아버지 아버지 오라버니에게서 듣고 자랐고, 늘 할머니가 자장가로 불러주시곤 했어요. 논농사 밭농사 지을 때 여러 사람들 앞에서 앞소리를 아리랑으로 매기면 동네사람들이 후렴을 하고, 마을잔치에서나 장날에 나서면 으레 소리판이 벌어집니다. 저도 아버지 손 붙잡고 따라 나섰다가 같이 무대에 서기도 합니다. 곧잘 따라 불렀습니다. 어머니도 노래를 잘하셨는데 양구가 고향이시라서 양구아리랑을 항상 부르셨습니다. 사회자: 기명창님, 오늘 1부에서 부르시는 아리랑 소개를 해주시지요.? 기연옥: 춘천아리랑, 양구아리랑, 정선아리랑, 춘천논매는소리(아라리) 사회자: 양구아리랑은 어떤 아리랑인지요. 그럼 아버지가 부르셨던 춘천아리랑과 어머니가 부르신 양구아리랑을 들어보기로 합시다. 제2부를 열겠습니다. 1부 끝--기명창 퇴장 ------------------------------------------------- 옷 갈아입을 동안-5분간 사회자 해설멘트 ------------------------------------------------- 사회자: 국가와 민족이 위난에 처했을 때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나 국권을 수호하는 의로운 군인이라고 합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위에서 아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동시에 자발적으로 일어난 것은 의병봉기가 처음입니다. 의병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자 유일한 사진을 남겨준 영국 기자 매켄지( Frederic Arthur Mckenzie)입니다. 주요한 부분을 여러분께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메켄지:나는 그들이 휴대하고 있는 총을 살펴보았다. 나이는 18세에서 26세 사이였다. 6명이 가지고 있는 총 중에서 5가지가 제각기 다른 종류였으며, 그 중에 하나도 성한 것이 없었다. 의병들의 조직을 물어 보았다. 그들은 사실상 아무런 조직을 갖추고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나이 어린 의병들은 자기들이 어떤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있음을 시인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어차피 죽게 되겠지요” 메켄지:당신들이 최근에 전쟁을 한 것은 언제였습니까? 의병: 오늘 아침에 저 아랫마을에서 전투가 있었소. 일본군 4명을 사살했고, 우리측은 2명이 전사했고 3명이 부상을 입었소. 메켄지:이상하군요. 두 배 이상의 전과를 올렸는데 왜 쫒겨 다니고 있습니까? 의병: 일본군은 무기가 우리보다 훨씬 우수하고 훈련이 잘 되어 있는 정규군이오.. 우리 의병 2백명이 일본군 40명에게 공격당해 패배한 적도 있을 정도요. 메켄지:일본군을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까?
-
[판아리랑] 유네스코 인류무형무산 아리랑 등재기념 -권정희의 강릉아리랑 한마당일시-7월 19일(금) 오후 7시 장소-창덕궁 소극장(창덕궁 앞) -강릉아리랑 서울에 올라오다- 할머니 아버지에 이어 명주(강릉) 지역의 소리꾼 집안을 잇고 있는 권정희 명창은 고성, 양양, 강릉, 삼척 지역의 아라리를 수집하여 왔다. 2005년부터 강릉문화원이 주관하는 국악시범학교를 통해서 젊은 세대에게 관동지역 아리랑을 가르쳐 오고, 2002년부터 매년 강릉단오제 무대에서 지역의 소리와 아리랑을 재현해왔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무산 아리랑 등재기념으로서울에서 태백산맥에서 삶을 이어가던 산간 벽지 화전민들이 불렀던 ‘강릉오대산아리랑’을 독립적인 무대에서 부르는 무대이다. "수수밭 터도지 내가 물어줌세, 구시월 한금까지만 기달려주게"라는 첫수에서 화전민들의 삶이 묻어나온다.
-
[판아리랑] 유네스코 아리랑 등재기년 1주년 축하 공연-지역 아리랑의 활성화‘아리랑’은 남과 북, 그리고 180개국 한민족 동포사회에서 ‘민족공동체의 동질감과 사회적 통합을 갖기 위한 기저로 작용하여 ’민족의 노래’ 라는 위상을 부여받았다. 아리랑의 창의성과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 아리랑의 미덕이고, 아리랑의 사회적 맥락 속에서 지속적으로 재창조되며 문화적 다양성을 높이고 한국인 정체성 형성과 공동체 결속에 주요한 역할을 해왔다. 유네스코는 특정지역에 머무르지 않고 ‘전국민의 아리랑’으로 세대를 거쳐 다양성을 가지고 재창조 되는데 중점을 두고 12월 5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7차 무형유산위원회'에서 아리랑을 인류무형유산에 등재권고를 내렸다. 1주년을 기념하는 전국 아리랑 전승단체 활성화를 위해 문제부에서 판아리랑을 개최하게 되었다. 전국 지역 아리랑 해설을 맡게 된 아랑학회 기미양입니다.
-
[판아리랑] 신인자 자매의 밀양아리랑 한마당일시-2013년 7월 19일(금) 오후 7시 장소-창덕궁 소극장(창덕궁 앞) 기획의도 <嶺南 名物 밀양아리랑>음반에 수록한 밀양아리랑을 무대에서 재현한다. 시대적으로 변용한 밀양아리랑의 현재적 가치를 확인한다. 밀양아리랑은 1926년 음반으로 발매된 후, 광복군아리랑과 독립군아리랑으로 불려지면서 항일성을 가지고서 본조아리랑과 함께 동반유행을 하게 되는 과정에서, 해외 민족운동 진영으로부터 ‘역사의 노래’로 불리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확인하는 무대이다. 밀양에서 3대를 이어가는 소리꾼으로 가업을 이어가는 아리랑 소리꾼 자매가 전승하고 있는 아리랑을 통하여 전승력을 확인한다. 신인자는 2010년에 김경호 옹과 함께<嶺南 名物 밀양아리랑>음반에 밀양아리랑을 제공했다. 밀양아리랑의 ‘탁월한 嶺南性’을 확인한다. 경상도 색깔이 분명한 첫 사설 ‘날좀보소~’로 시작되는데, 빠른 리듬으로 내어 지르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탁월한 嶺南性’의 노래이다. 이는 다른 지역의 아리랑과 변별되는 고유성을 갖는 속성임을 확인한다. 프로그램 제1부-아버지의 아리랑 밀양의 명물, 밀양아리랑 제2부-나의 아리랑 아랑의 애화가 서린 아리랑 제3부-역사의 노래 광복군아리랑 독립군아리랑 밀양아리랑의 특성 1. 밀양아리랑 토속성의 재발견 전통민요는 가락의 전통성, 기능의 생산성, 전승의 지속성을 지니는데, 밀양아리랑은 가락의 전통성에서는 지역의 기층음악성을 담보하고 있느냐에 대해서 의문을 던진다. 지금까지 발매된 음반의 모든 밀양아리랑 창자가 모두 서울소리 명창들이기에 경상도 소리보다는 경기소리에 가깝기 때문이다. 밀양아리랑 후렴은 ’지게목발소리‘라고 하는 ’아리당다꿍 쓰리당다꿍 아라리가났네‘로 부르는 형태이다. “밀양 특유의 사투리로 생동감과 즉흥적인 흥을 더욱 돋우고 있어, 활성적인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질러내는 소리는 경상도 사람들의 성급하면서도 시원시원함을 추구하는 성품과 관련되어지며····”라고 경상도 특유의 토속성으로 해석해야 한다. 2. 밀양아리랑의 전승은 <밀양백중놀이>와 <게줄다리기> 민속놀이 공연에서 지속적으로 불려지게 되면서 전국에 알려졌다. <밀양백중놀이> 주요 소리꾼이신 아버지에 이어서 신인자는 동생과 함께 가업을 이어가고 있는 과정에서 밀양아리랑을 전승하고 있다. 3. 밀양아리랑의 항일성 밀양아리랑 선율로 만든 광복군아리랑과 독립군아리랑 이 두 아리랑은 1920년대 항일운동 거점이었던 중국 민족운동 진영에서 ‘항일의 노래’라는 지위를 얻었고, 이 중 밀양아리랑은 <독립군아리랑>으로부터 임시정부 국군 광복군의 공식 군가 <광복군아리랑>까지 그 기능을 분명하게 입증해 주었다. 이는 오늘의 ‘민족의 노래’라는 아리랑의 위상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이다. 밀양아리랑 선율로 부른 광복군아리랑과 독립아리랑은 1926년 개봉 2년 후 인기의 극점에 있던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인 아리랑과 동반하여 유행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영화<아리랑> 개봉 시 주제가 가사를 수록한 선전 전단지가 압수당하면서 아리랑의 항일성이 더욱 강화되는데, 이러한 항일성에 동화되어서 밀양아리랑은 곡조의 경쾌함보다 저항성에 더 직접적인 방점을 찍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즉 민족사의 아픔을 밀양아리랑이 함께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항일민족운동 현장에서 함께 불려지게 되는데. 이는 ‘아리랑의 역사에의 의탁성향’이라고 명시된다. 4.배경설화와 밀양아리랑노래비가 있다. 일제강점기 밀양아리랑을 독립적으로 다룬 1928년《別乾坤》8월호에 차상찬(車相贊)의<密陽의 七大名物, 구슲픈 密陽아리랑>이란 의미 있는 글의 한 대목은 다음과 같다. “어느 지방이던지 아리랑타령이 없는 곳이 없지만은 이 밀양의 아리랑타령은 특별히 정조가 구슬프고 남국의 정조를 잘 나타낸 것으로서 경상도 내에서 유명할 뿐 아니라 지금은 전국에 유행이 되다시피 한 것이다. 그러나 수심가는 평안도에 가서 들어야 그 지방의 향토미가 있고, 개성난봉가는 개성에 가서 들어야 개성의 멋을 알고, 신고산 아리랑타령은 함경도에 가서 들어야 더욱 멋이 있는 것과 같이 이 밀양아리랑타령도 서울이나 대구에서 듣는 것보다 밀양에 가서 들어야 더욱 멋을 알게 된다. 특히 화악산(華岳山) 밑에 해가 떨어지고 유천역에 저녁 연기가 실낫같이 피어오를 때에 낙동평야 갈수통 속으로 三三五五의 목동의 무리가 소를 몰고 돌아오며 구슬픈 정조로 서로 받아가며 부른다. 이렇게 하는 소리를 들으면 참으로 구슬프고도 멋이 있고 운치가 있다. 아무리 급행열차를 타고 가는 사람이라도 그 누가 길을 멈추고 듣고 싶지 않으랴.~“(중략) 밀양아리랑 사설 날좀보소 날좀보소 날좀보소/동지섯달 꽃본듯이 날좀보소(후렴) 아리아리랑 아리아리랑 아라리가났네/아리랑 어얼시고 넹겨 넹겨 주소//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났네/아리랑 고개로 잘넘어간다.(후렴) 영남루 명승을 찾아가니/아랑에 애화가 전해있네//
-
[음반] 3대가 부르는 진도아리랑 (강송대.강은주.)
-
[음반] 영남아리랑의 재발견정은하, 영남 아리랑의 재발견 이 음반은 우리나라 아리랑권역 중에서 경상도와 대구광역시와 부산특별시를 포함하는 영남지역에서 불려지는 아리랑과 대중적으로 불리는 타지역 아리랑으로 엮은 것이다. 여기에 수록된 영남의 아리랑은 토속 아리랑인 문경아리랑과 1926년 일제강점기 잡가적 성격의 신민요로 형성된 밀양아리랑과 근래 들어서 창작된 대구아리랑 등 **종과 전국적으로 불려지는 아리랑 *종을 수록했다. 특히 밀양아리랑·경상도아리랑·광복군아리랑·독립군아리랑·울릉도아리랑·독도아리랑 등을 수록한 것은 감상용으로 형상화 한 뜻깊은 작업이다. 이들 영남아리랑의 음반화는 우선 아리랑이 영남인 공동체의 의사소통어로 존재해 왔음을 확인하는 의미가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 아리랑의 현재상을 조망케 하여 영남인의 역동성을 담은 심상(心象)의 전승이자 잃어버린 대동의 자족을 복원하는 행위전승으로 예능화 하여 현대적 콘텐츠 요소로 활용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이런 사정에서 이번 음반은 의미 있는 ‘영남 아리랑의 재발견’인 것이다. 소리를 한 이는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경기민요를 전공한 명창 정은하이다. 정은하는 1980년대 중반부터 대구에서 <영남민요보존회>를 결성, 운영해오며 2000년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 기념 <대구아리랑제>를 기획하여 2007년 지금까지 주관해 오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 ‘도시형 아리랑축제’로 주목을 받고 있다. 앞으로 이 음반은 2011년 세계육상경기대회 등을 통해 영남아리랑의 세계화에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아리랑학회 李海植(영남대 교수) 저는 방금 소개 받은 영남대학 이해식입니다. 소개 받은 바와 같이 영남 아리랑의 이론적 설명이라기보다는 몇 가지 축하의 말씀을 겸하고자 합니다. 정은하 선생은 이 자리의 인사말에서 열심(熱心)히 하겠다는 말로 끝을 맺었습니다. 열심이란 글자 그대로 뜨거운 마음이요 이를 바꾸어 보면 열성, 또는 열정이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보아온 정은하 선생은 국악의 현장에서, 대학의 강단에서, 참으로 민요에 대하여 남다른 열정으로 살아왔고 오늘 이 자리도 그의 열성의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저는 학생들과의 수업에서, 그리고 저의 어느 글에선가 우리 나라 대학의 국악과가 산조로 시작해서 산조로 끝남도 좋지만 국악과가 있는 그 지방의 토속민요(native music)를 발굴, 지역 음악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한 적이 있습니다. 토속민요란 그 지방의 사투리와 같은 것이어서 이런 토속성이야 말로 우리의 정체성(identity)이고 소중한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의 이런 바램을 정은하 선생이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었는데 그는 거간의 민요 발표회에서 영남지방의 토속민요를 찾아내어서(재발견) 불렀고 또 오늘 이 자리에서는 영남지방의 아리랑을 재발견하여 기록한 CD 출반 기념회를 열고 있습니다. 우리 문화의 일부가 한류(韓流 Korean stream)라는 이름으로 일본과 동남아에 퍼지고 이제는 북한에까지 흘러서 북한 당국이 제재하기에까지 이르렀다는 최근의 기사를 읽었습니다. 한류는 한민족의 흐름이겠는데 저는 이러한 한류가 아리랑流이고 또한 한민족을 아리랑 민족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왜냐면 아리랑은 우리의 영혼(sprit)이고 우리 민족의 영성(靈性)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특히 영남지방에 이토록 아리랑이 많음은 영남이라는 토리(idiom)가 극명함이요 세태의 반영이요 영남 사람들의 인성적 토리(idiom)가 극명함이요 세태의 반영이요 영남 사람들의 인성적 특색의 들어남이라고 하겠습니다. 여기서 인성적 특색이라 함은 방금 말한 영성을 말합니다. 우리의 삶과 죽음 가운데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은 우리의 삶을 완성하고 죽음은 시간을 달리하는 다른 세상의 시작입니다. 이 사이에서 부르는 사랑가가 곧 아리랑입니다. 실로 어느 아리랑의 가사이든 선율이든 그것은 모두 사랑의 세계입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 정은하 선생의 영남 아리랑 재발견은 영남 사랑가의 재발견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다른 표현은 아름다움이요 아름이란 전라도 판소리에서 사투리로 말하는 알속(알의 속내, 眞 또는 實)이요 다움은 如로써 아름다움은 바로 진여(眞如)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정은하 선생은 아름다운 사람이요 오늘 아름다운 일을 벌인 알속 있는 사람입니다. 아름다움과 동반하는 말이 멋입니다. 우리는 흔히 멋있는 사람, 또는 멋쟁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런 말은 바로 정은하 선생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아름다움이 없는, 즉 실속이 없는 멋은 겉멋에 불과합니다. 참 멋은 자유의 세계이고 사유(思惟)와 창조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정은하 선생이 출반한 영남 아리랑 CD는 정은하 선생의 실속이 가득 찬 자유와 사유(思惟)와 창조의 멋진 성과물입니다. 돌이켜보면 정은하 선생의 민요 인생은 아마 태생적(胎生的)이 아닌가 합니다. 다시 말하면 시쳇(時體) 말로 타고난 팔자라는 뜻입니다. 제가 70년대 초에 KBS 라디오의 국악 프로듀서일 때 정은하 선생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는 이미 그때에 민요인생의 초입(初入)에 들어섬으로 보였고, 한결같은 천착(穿鑿)으로 오늘에 이르렀음에 심심한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남 지방의 민요들은 거의 메나리조로 되어 있습니다. 메나리조는 영남 지방의 계면조(界面調)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뜻은 뫼 산(山)의 메와 나루의 옛 말인 나루(津)가 합쳐진 말로써 산나루가 되겠습니다. 나루는 물 가나 바다 가에 있는 거지 산에 무슨 나루일까마는 이것은 물을 뜻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메나리란 산과 물(山水)이란 뜻입니다. 산 계곡을 흐르는 물처럼 삶의 계곡이 민속(民俗 folk)이며 이 민속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통시적인 (diachronic) 삶의 이끼가 될 때 토속이 되며 이때의 노래가 토속민요입니다. 자고로 산과 물을 사랑하는 이곳 사람들의 메나리조 민요는 토속적인 깊은 정서로 그윽하게 불리어왔습니다. 이러한 메나리조 음악은 저 신라시대에 전래된 불교음악인 범패에 그 맥(脈)이 닿고 이 범패는 서역(西域 silk road)을 거슬러서 인도와 소아시아(Asia minor)까지 연관(聯關) 됩니다. 이렇게 보면 영남의 메나리조는 우리의 생각보다 더 넓은 세상과 이미 호흡을 함께해 왔고 그 호흡 속에 정은하 선생이 재발견한 영남의 아리랑들이 숨 쉬고 있었습니다. 숨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그럼 오늘 정은하 선생이 재발견한 영남 아리랑의 힘찬 숨결이 부디 영원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07. 7. 13. Hotel Inter Burgo, Camellia hall/대구). 참고 문헌 유동식, [풍류도와 요한복음], 서울: 한들출판사, 2007. 이해식, "경상도쪼(調) 민요의 통시성과 토속성,” [산조의 미학적 구조론], 경산: 영남대학교 출판부, 2006.
-
[판아리랑] 대구아리랑 영천아리랑을 전승하는 정은하 명창(해설:기미양/아리랑학회)판아리랑 해설을 맡은 아리랑학회 기미양입니다. 이 행사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 등재 기념 3주년을 축하하는 의미로 개최되는 지역 아리랑 활성화를 목적으로 하는 판아리랑입니다. 제1차에서는 서울지역 서울아리랑을 주제로 발표를 했고 이번 주는 진도아리랑에 이어 대구와 경상도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전승활동을 하시는 정은하 명창을 모셨습니다. 간단히 소개를 하면 정은하 - 출생1956년 (경상북도 영천) 7남매의 외동딸 소속 영남민요보존회 (이사장)수상 1976년 이창배`안비취 선생을 사사, 중요무형문화재 57호 경기민요 이수자 2004년 문화관광부장관 표창장 2002년 제4회 상주전국민요경창대회 명창부 대통령상 1985년 한라문화제 최우수상 1998~ 대구교원연수원 강사, 대구교대`영남대`대구예술대`경북예고 이창배, 안비취, 이춘희 사사 대구 동구 불로동 출신인 최계란 선생이 1936년 취입한 PS 판 대구아리랑을 전승 음반 대구아리랑, 영남아리랑의 재발견.- 팔도 아리랑, 여러 음악장르를 넘너드는 음반 12월 유네스코(UNESCO) 인류무형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되는데 숨은 공로가 있다. 유네스코 등재시 가장 주용한 대목이 바로 자생적 전승입니다.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지역이 바로 영남의 아리랑입니다. 영남아리랑지부가 27개 지부, 광복군아리랑. 독립군아리랑, 영천아리랑을 초연했다. 2000년<615공동선언기념아리랑음악회>에서 당시에는 남한에서 유일하게 영천아리랑을 부를 수 있는 국악인으로 대구에서 정은하선생를 모셨다. 고향이 영천인 그는 영천아리랑을 경상도조로 당차게 불러주어서 청중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이를 계기로 대구아리랑 음반을 시작으로 2003년부터 매년 ‘대구 아리랑제’를 열고 있다. 2012년 대구아리랑 경창대회도 함께 개최하고 있다. 또 2007년부터는 영천에서 ‘영남아리랑축제’를 전국아리랑경창대회를 겸해 열고 있다. 그 자신도 2003년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를 계기로 지역의 지명`사투리를 곁들여 현대적으로 만든 ‘대구 아리랑’을 발표한 바 있다. ‘어데예! 아니라예! 핑계만 말고 좋으면 좋다고 눈만 껌뻑 하이소/ 팔공산 수태골 감도는 구름아 우리님도 내 못 잊어 그리 떠도느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가 났네’ <대구아리랑제>는 우리나라 도시축제의 한 모델로, 영남지역 아리랑의 실상을 부각시킨 ‘아리랑사의 업적’을 이룬 것이다. 이는 우리가 인정하고 평가해야할 사실이다. 이 <대구아리랑제>는 ‘1936년 최계란본 대구아리랑’을 시작으로 정은하의 음반 ‘대구아리랑’ 탄생 배경이 담겨있다. <대구아리랑제>는 8.15기념 행사라는 지향점을 기반으로 역사성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제1회 대구아리랑축제에서 그는 "매년 8월 15일이 되면, 우리 모두 대구에서는 대구아리랑제가 열리는 날임을 기억합시다. 그럼 내년에 다시 이날 이 자리에서 우리 모두 <대구아리랑제>가 열리는 한마당에서 만나서 아리랑을 부릅시다."라고 약속을 했다. 일제치하에 영남인들은 밀양아리랑 곡조에 광복군아리랑을, 영천아리랑 곡조에 독립군아리랑 가사를 얹어서 부르며 독립을 위해 일제와 항쟁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를 기념하여 매년 광복절 기념일 8월15일에는 <대구아리랑제>가 막을 올린다. 그는 이 약속을 12년 동안 지켜오고 있다. 감히 몇 마디 찬사로 축하하기엔 송구스러울 뿐이다. 아리랑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남아리랑의 역사성을 확인하고자, 2008년에는 건국60주년 기념으로 김구선생과 만주벌판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광복투사의 애국심을 담은 ‘광복군아리랑’을 주제로 <김구의 아리랑>을 소리극 건국60주년 기념하는 '김구의 아리랑'(2008년), 의병장 안중근, 독립운동가 김산을 2009년 2013년 김산 재조명했다. 옥중가아리랑을 초연, 김산의 아리랑연가를 영어로 초연을 했다->숭고한 애국정신과 광복의 가치, 아리랑의 대동정신을 하나의 시대정신으로 승화시키려는 의도로 준비했다. 아리랑은 독립만세운동 당시 행진이나 집결지 시위 때 불려졌다. 아리랑은 이처럼 항일민족운동의 순간에도 함께하면서 저항·대동 정신 등을 기조로 한 민족의 노래로 더욱 깊은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정은하 (사)영남민요`아리랑보존회 회장은 맥이 끊어질 위기에 놓인 우리 민요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에 평생을 30여년 동안 바쳐왔다. 대학교수들과 함께 영남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찾아내 전수받고 기록으로 남긴 전승민요는 수십 곡에 이른다. 예천 통명농요(중요무형문화재 84호), 예천 공처농요(경북도 무형문화재 10호), 안동 저전농요(경북도 무형문화재 2호), 구미 발갱이들소리(경북도 무형문화재 27호), 달성 하빈들소리(대구시 무형문화재 16호) 등등이다. 특히 악보화 작업, 구미 발갱이들소리는 거머리가 다리에 붙은 것도 모른 채 농민들과 모 심어가면서 배웠고, 베 짜는 노래는 베틀을 사 베를 짜면서 배웠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지원사업인 인류무형문화유산 활용 관광자원화 사업 선정작 '판. 아리랑'은 '2014 세계무형유산활용 관광자원화 지원사업' 선정작인만큼 아리랑의 다양성과 보편성을 외국인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가 우선 고려 대상이다. 지역성을 살린 독립적인 공연이 가능한가? 아리랑이 자생적 전승 실체임을 보여주는 기획이다. 전국 8도아리랑보존회, 아리랑명창, 아리랑연구진, 한국창극원이 참여한다. 오늘 무대의 전체 구성은 1부 정은하의 아리랑 공연. 2부, 창극 '우리 누이들은 어떻게 정신대할머니가 되었나' 2부 민족의 노래 아리랑, '판. 아리랑'의 구성·연출을 맡은 박종철 창덕궁소극장 대표는 정신대 할머니의 기억속에 전승되는 아리랑'를 통해서 '아리랑이 기억하는 민족 수난사'를 대변하려고 했고, 한 지역을 대표하는 명창이 무대에서 외국인에게 얼마만큼의 감동을 줄 수 있는지를 창자와 관객이 경험하는 실험무대라고.. "우리는 UNESCO 인류문화유산 등재국, 중국·북한은 국가무형유산 지정국"이라면서 "3국이 아리랑을 주제로 세계인 대상 콘테스트를 벌이면 우리는 '8도아리랑'을 내세우면 된다"고 밝혔다.우리는 아리랑을 '민족의 노래'로 향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는 두 가지 목표를 제시했다.에 대해서도 심사숙고하고 있다. 2부-우리 누이들은 어떻게 정신대할머니가 되었나'-정신대아리랑. 못다부른 아리랑.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서 억울하게 비참하게 이름 없이 돌아가신 정신대라는 조선처녀들의 명복을 비는 마음에서 박종철 대표가 작품 정신대는 1937년 中日전쟁으로 시작된 강제동원관리의 ‘한국여성근로자와 종군위안부’를 말한다. 12세~40세로 약 20만명이 끌려갔다. 신나이(新內) '나의 아리랑'_노래/오까모토 분야(09:45) 오키나와 아카섬에는 일본에 위안부 46명들이 머무던 곳에는 아리랑고개가 있다. ‘아리랑 고개’라는 이름은 위안부들이 오르내리며 아리랑을 부르며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을 보고 마을 주민이 붙여준 이름이다. 여성정신대까지 동원령을 공포 "중학교를 보내주겠다"며 11~14세의 어린 여성을 현혹‘일부 학교 교장들은 "정신대에 가지 않으면 졸업장을 주지 않겠다."
-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장 정은하 이력서(사)영남민요아리랑보존회 이사장 정은하 경북 영천 출생 2003년-2020년 대구아리랑제 주관 2006년-2020년 최계란명창대구아리랑전국아리랑경창대회 주관 1976년 이창배`안비취 선생을 사사, 중요무형문화재 57호 경기민요 이수자 2004년 문화관광부장관 표창장 2002년 제4회 상주전국민요경창대회 명창부 대통령상 1985년 한라문화제 최우수상 1998년~ 대구교원연수원 강사, 대구교대`영남대`대구예술대`경북예고 대구 동구 불로동 출신인 최계란 선생이 1936년 취입한 PS 판 대구아리랑을 전승하고 있다. 음반 대구아리랑, 영남아리랑의 재발견.- 팔도 아리랑, 여러 음악장르를 넘너드는 음반을 내놓았다. 12월 유네스코(UNESCO) 인류무형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되는데 숨은 공로가 있다. 유네스코 등재시 가장 주용한 대목이 바로 자생적 전승이다.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지역이 바로 영남의 아리랑이다. 영남아리랑지부가 27개 지부, 광복군아리랑. 독립군아리랑, 영천아리랑을 초연했다. 매년 광복절 대구에서 대구아리랑제를 개최한다. ■ 경력 1980,12,23 kbs 민요백일장 장원 1992 경북교원연수원 출강 1992~2000 대구예술대학교 국악과 강사역임 1994,11,01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이수 1994,06 초ㆍ중등교과서민요 오아시스CD음반 및 해설집 출간 1994 경북예술고등학교 출강 1996 대구교육대학 음악과 출강 1997 영남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출강 1998 대구 교원연수원 출강 2003,12.26 대구아리랑 CD출반 /신나라 뮤직 2002,04,25 전국민요경창대회 명창부 대통령상 수상 2002, 음반 영천아리랑 CD출시 2004, 팔도아리랑 문화관광부 장관상 수상 ■ 연주 및 발표회 1991,06,03 주최 제1회 정은하 민요발표회/대구문화예술회관 대극장 1995,05,06 주최 제2회 정은하 민요발표회/대구시민회관 대강당(2회) 1996,05,09 주최 제3회 정은하 민요발표회/대구시민회관 대강당(2회) 2002,02 23 영남민요보존회 결성,회장 / 대구시민회관 1998,05,08 영남의 소리 국립국악원 초청 2001,11,03 주최 제4회 정은하 영남민요창작발표회 2002,06.15 서울 인사동 야외특설무대 남북공동선언 아리랑 축하공연 2002.01,09 주최 제5회 정은하 영남민요발표회/대구시민회관 대강당 2003.08.23~24 주최 제1회 팔도아리랑축제 /대구시민회관 대강당 2003,10.23 주최 팔도아리랑축제 앙콜공연/계명대학교 노천당 2004,05.15 주최 제6회 영남의 소리 발표회/ 대구시민회관 대강당 2004,08.25~26 주최 제2회 대구아리랑제 대구시민회관 대강당 2005,08.15~16 주최 제3회 대구 아리랑제 대구오페라 하우스 2005,09.10 영남의 소리 아리랑강습회 16주 3개월간 2005,10.10 대구교육대학교 아리랑 및 영남의 소리특강 2005,10.28 영천아리랑제 영천시민회관 2006,08 ,15 주최 제4회 대구아리랑제 시민회관 대강당 2006,11,18 (사단법인) 영남민요 아리랑 보존회 창립 2007,07,13 영남아리랑 재발견 CD음반 신나라 뮤직 2007,08,15 주최 제5회 대구아리랑제 시민회관 대강당 2007,10,3 주최 제1회 영남아리랑 축제 전국아리랑 경창대 2008,08,15 주최 제6회 대구아리랑제 시민회관대강당 2008.10.4.주최 제2회영남아리랑축제 전국아리랑경창대회 2020.08.15 제17회 대구아리랑제 개최
-
문자보급가 아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