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의 날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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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자매결연협약식 (문경/울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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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정제빵소 사할린 동포들에게 빵 나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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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아리랑전국경창대회 대상을 수상한 황효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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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이동희 '흙의 소리' 출판기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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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아리랑을 부르는 4대 가족. 강송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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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음반 작업<br>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이혜솔 회장 아리랑전승활동 연보 이혜솔 회장은 2011년부터 매년 왕십리아리랑제를 개최하고 있다. 왕십리아리랑(2013년), 사할린아리랑(2017년) 서울아리랑(2018년), 아리랑코로나 (2020년), 연꽃아리랑(2021년), 등을 레파토리로 부르고 있다. 2019년 일본 미야기현 센다이 대림사에서 주최하는 안중근의사추모제에 한국대표로 초청을 받아 안중근의사를 추모하는 ‘아무르아리랑’을 헌정했다. 2019년 제3회사할린아리랑제에서 사할린아리랑을 불렀다. 제1회(2021년) 2회동두천아리랑제(2023년), 제1회안성아리랑제(2022년) 제1회동두천평화아리랑제 초청공연, 매년 동포들에게 한복 기증, 사할린아리랑보존회 지도교사 2016년~현재 전국아리랑전승지역 아리랑답사(문경, 진도, 정선, 밀양, 춘천, 서울,동두천 등) 2020년~현재 아리랑코로나(독도에서 제주까지) 전국순회공연 8월15일 한러수교30주년기념 ‘고려인청소년과 함께’대한민국 역사 탐방(주관:국악신문) 2021년~현재 아리랑학교 개최(총산 10회) 주관: 아리랑학회 (기미양 연구이사) 10월 31일 은빛축제 국악경연대회 대상 수상 2022년~현재 ‘찾아가는 사할린아리랑’ 공연(김포, 파주, 양주, 인천) 주최 :전국사할린귀국동포연합회 2022년 07월09일. 양평두물머리 연꽃아리랑 10월15일 한반도아리랑(주관:밀양시/전국16개아리랑전승 단체 초청공연) 본 단체 참가 2021년 6월13일 독도아리랑버스킹 10월2일 제1회함양국제시니어아트페스티벌 초청공연 2022년 04월04일 고려인문화관 특별전 초청공연 아리랑 공연 05월18일 '제주아리랑은 다르다' 제주아리랑연구회 초청공연 07월04일 제1회동투천아리랑제 초청공연-아리랑한마당 07월09일 두물머리아리랑버스킹 공연(연꽃아리랑 초연) 10월11일 20개 지역 아리랑단체 '아리랑길놀이' 참가(밀양시 초청) 12월20일 제1회안성아리랑제 초청공연 12월 4일 아리랑등재10주년아리랑건립식 기념 아리랑 초청공연 2023 2월25일 고려인 너머10년기념 소극'사할린아리랑. 아무르아리랑' 공연 3월15일 인류무형문화유산아리랑비 100일기념 아리랑공연 8월15일광복절기념 ‘광화문아리랑버스킹’ 공동주관 5월19일 2023신평화아리랑 평화축제 초청공연(주관 천주평화연합) 6월11일 전국사할린귀국동포연합회 감사장 수상 12월 22일 제5회라일락총회 초청공연 2024 3월 23일 파주사할린귀국동포회 공로상 수상 5월26일 제1회김법국국악상 수상 출천:(주)국악신문(www.kukak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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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깁법국국악상 수상한 이혜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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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동포 초청한 '국립국악원 유지숙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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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아리랑경창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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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전설의 녹음스튜디오 ‘훈’에 대한 단상‘誕’의 순간을 마주하는 일은 설레고 벅차다. 생명의 탄생은 물론이거니와 원고 몇 장의 출력조차도 마찬가지다. 모두 전혀 다른 독립적인 원형의 탄생이며 형태의 탄생이기 때문이다. 곳곳의 봄꽃들이 그제 모습들을 자랑하는 4월 마지막 금요일, 음원(音源)의 탄생 순간을 함께했다. "교대(서울교육대학) 후문에 있는 훈 스튜디오 사장님 아들이 근무하고 있는스튜디오”에서 만감이 오고 갔다. 만일 이렇게 부연(敷衍)한 상호가 아니었다면 찾아가지 않았을 것이나, 이 말에 불광동 골목을 돌고 돌아 찾아온 것이다. "훈 스튜디오 사장님”은 ‘이훈’, 그 아드님이 근무하는 고래사운드 스튜디오 실장은 ‘이유성’이다. 1992년 민주화 운동(?) 체류탄 연기 속에서 태어난 ‘아리랑CD 제1호’ 발매 이후 25종의 아리랑CD를 제작하면서 거의 대부분은 ‘훈’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하고 믹싱(mixing) 같은 후반 작업도 했다. 코로나가 오기 직전 마지막 녹음이 ‘이혜솔, 인생의 소리길 왕십리아리랑’ 일부의 녹음이었다. 당시 교대 후문 훈스튜디오에 처음 오는 이들은 "와~!”라는 감탄사를 발한다. 대기실과 작업실과 녹음 부스 할 것 없이 곳곳에 80년 대부터 최고의 가수들 녹음장면 사진과 그들의 음반은 물론 스튜디오에 준 휘호(작곡가 김희갑 선생과 가수 장사익 선생)나 사인지(박범훈 총장 서태지와 아이들)가 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놀라움에 두리번거리면 "아리랑이시지요. 이번은 어는 지역 아리랑인가요?”라며 우리를 맞이 하시는 분. 나직한 체구의 전문가 포스의 시선, 그러나 온화한 눈매의 이훈 사장님이다. 이어 작업실로 안내하여 들어가면 다소 거만하기까지 한 믹싱 전문 남성 기사와 역시 씨크한 인상의 여성 바란스 전문 기사 두 분을 소개해 준다. 이것이 그동안 2, 3년마다 만나는 진풍경이다. 녹음은 주로 훈 사장님이 직접 맡고, 부수 마이크 세팅과 체킹 등은 기사들이 완성해 준다. 믹싱과 바란스 작업은 두 전문가가 다른 일정을 잡아 수행한다. 이분들은 선율, 박자, 강약 등 미세한 부분까지 가능하게 하는 기술적 수정, 보완을 통해 완결된 음원을 내놓는다. 이런 직업상의 특성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사장님은 소리꾼과 반주자들, 그리고 함께 온 이들에게까지 부담을 갖지 않게 하는데 최대한 편안하게 배려를 해주신다. 까다로웠던 다듬이 소리가 들어가는 ‘문경새재아리랑’(송옥자 선생과 보존회원들) 음원 녹음 때도 특히 그랬다. 10명이 두드리는 다듬이 소리를 녹음하는 까다로운 작업이라 모두 긴강하고 있었는데, 훈 시장님은 하루종일 걸리는 오랜 기술적 시연을 반복하면서 원만하게 처리해 주었고, 오지에서 온 연로한 분들이 편하게 녹음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녹음실 부스에서 연행자와 각각의 악기 연주 기념사진을 찍는 번잡함도 장소 사용 등에 대해 배려를 해준다. 이러한 배려가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최고의 녹음 전문 스튜디오의 명성을 갖게 한 배경일 듯싶다. 바로 이런 스튜디오에서 탄생한 음원으로 정선·대구·밀양·문경·춘천·공주·경산 등 지역 아리랑 음반이 발매되었고, 이들은 나름의 완결성와 고유성을 독자적으로 보유하고 있다. 이런 지나간 시간들을 회상하며 들어선 스튜디오에서 콘설을 마주하고 있는 이를 보고 직감했다. "훈스튜디오 사장님의 아들”, 빼어 닮았다. 키도 그만하다. 자태도 그 모습이다. 이내 반가움과 편안함이 왔다. 4년여 만에 훈 사장님을 만나는 듯했다. ‘훈’ 스튜디오 자체가 아니라 그 사장님을 기억했듯이 ‘고래 사운드’가 아닌 ‘훈 사장님의 아들’인 것이 그저 너무 반가웠던 것이다. 가끔씩 손에 닿은 아리랑음반 해설에 담긴 훈스튜디오에서 찍은 사진들. 이를 볼 때마다 떠올린 사장님. 분명 하늘에서도 이번 ‘이혜솔, 인생의 소리길 왕십리아리랑’ 녹음 작업을 내려다 보고 계시는 듯하다. 스튜디오를 방문한 이재옥(한연연회) 회장님, ‘정선에 가면’을 녹음한 유망한 소리꾼 곽동현, 피리와 장구 반주를 해준 두 분은 사장님에게는 낯선 분들이다. 그러나 모두 아리랑을 지극하게 생각하는 분들이니 반가워 하실 듯하다. "훈 사장님, 그립습니다. 사장님은 우리나라 역사적 음반의 존재와 함께 영원하실 것입니다. 의미가 있는 일은 누군가는 기억할 것입니다. 그 말석의 아리랑 음반들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추모의 마음, ‘이혜솔, 인생의 소리길 왕십리아리랑’에 고이 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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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만에 모국을 방문한 1세대 사할린 동포 환영합니다일제강점기에 러시아 사할린으로 강제 이주된 사할린 동포 1세대 어르신들이 17일 인천국제공항 제1여객터미널을 통해 입국했다. 17일 11시 50분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 휠체어를 탄 5인과 18명의 사할린동포 1세대 23명이 입국했다. 4년만에 모국방문을 위해 블라디보스톡에서 북경 다싱 공항을 경유하여 온 고단한 여정이었다. 코로나19의 장기화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항공 운항 축소의 결과이다. 이번 사할린 동포들의 모국 방문은 대한적십자사가 주관하는 ‘사할린동포 일시 모국방문 지원사업’이다. 1945년 8월 15일 이전 출생한 사할린, 블라디보스톡, 하바롭스크 거주 동포들로, 대한적십자사(회장 김철수)의 요원들과 4년간 ‘사할린아리랑축제’를 개최한 바 있는 (사)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이사장과 기미양 사무총장, 그리고 왕십리아리랑보조회 이혜솔 이사장이 프랭카드와 꽃다발을 들고 영접했다. 이번 방문자들은 1세대들로 2세 가족들과의 이산 문제로 영주귀국을 포기한 이들이다. 6박 7일간 이미 영주귀국한 형제와 친지들과 재회하고, 경복궁, 청와대, 남대문시장 등을 방문하여 고국 전통문화를 체험하게 된다. 23일 토요일 귀국일까지 대한적십자사 의료진 등의 지원으로 방문 체험을 마치면, 대한적십자사의 출국 업무 지원을 받아 귀국한다. 한편, (사)아리랑연합회 기미양 사무총장은 (사)갈물한글서회 기혜경 회장과 작가 10여명의 후의로 서예작품 한글 가훈(家訓)을 방문자들께 기증하고, (사)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이사장은 ‘사할린아리랑’ 등 여러 아리랑을 선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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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회담 60주년 기념, “아리랑으로 한일관계 재정립하자”http://www.kukak21.com/bbs/board.php?bo_table=news&wr_id=35274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 체결. 이는 일본이 한국을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로 인정한 것으로써 법적지위, 청구권, 경제협력, 어업문제에 대한 협정 체결이다. 1910년으로부터의 긴 한일관계의 정치적 매듭으로, 전후 격심한 혼란을 겪었지만 한일국교정상화라는 새로운 시대의 출발임은 분명하다. 이로부터 60년을 보낸 오늘, 새로운 개념의 진정한 한일관계 정상화를 문화의 저력으로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문화 저력에 의한 한일관계 재정립, 이 시대적 과제의 단서는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에 의탁할 수가 있다. 다음의 다섯 가지에 근거한다. 하나는 아리랑 역사상 첫 활자 기록을 일본인에 의해 존재한다. 바로 1894년(明治27년) 5월 31일자 『郵便報知新聞』(유우빈호우치신문) 기사 <朝鮮의 流行謠 아리랑>이다. 이는 조선 민중의 정서를 청취하기 윈한 목적으로 조선의 유행요 아리랑에 관심을 둔 결과이다. 이는 1896년 미국 선교사 H.B 헐버트의 <Korean vocal music> 보다 2년 앞선 기록이다. 둘은 한일회담 과정에서 아리랑은 양국 국가를 대신한 사실이다. 한일회담 최고 난제였던 대일청구권 문제 해결로 한일회담의 실질적인 타결이라는 1962년 11월 12일 ‘김종필 오히라(金鍾泌大平) 메모’ 서명 순간, 일본 외무성이 아리랑을 연주해 주었다. 한일 국가 연주를 대체한 것으로 매우 의미가 크다. 이는 1993년 11월 6일 일본 수상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가 김해공항에 도착했을 때 아리랑으로 환영한 것과 같은 것이다. 셋은 "앞당긴 통일”로 평가되는 남북단일팀 ‘단가 아리랑’ 합의에 따른 단일팀 출전에 공동 국가 아리랑을 처음으로 시행된 곳이 일본이란 사실이다. 1990년 남북단일팀 결성 후 첫 국제경기가 일본 고베에서 개최된 세계탁구경기였다. 이때 분단 46년만에 처음으로 ‘코리아KOREA’란 이름으로 한팀이 되어 ‘한반도기’를 들고 아리랑 연주 속에 출전하여 세계의 장벽 중국을 꺾고 우승을 하였다. 당연히 수상식에서 우승 메달을 받는 순간 아리랑이 국가(國歌)로 연주되었다. 명실공히 아리랑이 한민족의 노래임을 세계에 입증한 것이다. 넷은 1930년대부터 1965년까지 일본에서 유통된 ‘일본아리랑’이 48종에 이른다는 사실이다. ‘일본아리랑’이란 일본에서, 일본 작곡가에 의해 작곡/편곡 되고, 일본 작사가에 의해 작사 되고, 일본 가수가 일본어로 부른 ‘아리랑’ 표제 작품을 말한다. 그런데 이 ‘일본아리랑’이 1931년 ビクター文藝部 編曲, 西條八十八 작사, 小林千代子 노래 ‘アリラン’이 첫 작품이다. 이어 하세가와 이치노(長谷一郞)로 알려진 채규엽이 일본말로 부른 ‘アリランの唄’이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널리 유행했는데, 1932년 일본 최고의 작곡가 古賀政男 編曲, 佐藤惣之助 作詞, 淡谷のり子와 長谷川一郎(蔡奎燁)의 노래이다. 이로부터 ‘아리랑 야곡(’アリラン夜曲), ‘아리랑 추억(アリランの思ひ出)’, ‘도도이야쓰 아리랑(都々逸アリラン)’, ‘아리랑 부시(アリラン節), ’아리랑고우타(アリラン小唄), ‘아리랑이야기(アリラン物語) 등 ‘아리랑’ 표제의 총 48종이나 된다. 매우 놀라운 사실이다. 어느 나라도 이런 노래의 사연을 갖는 경우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다섯은 아리랑에 얼킨 숙제 하나가 일본에 있다는 사실이다. 해결해야 할 문제인데, 그것은 우리 영화 최고의 작품이지만 필름이 없어 미스테리로 남아있는 ‘영화 아리랑’ 필름이 일본에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것은 "대동아전쟁기 폭약 제조용으로 관리하고 있던 일본 한국 대만의 영화필름 속에 나운규 감독 영화‘아리랑’이 포함되어 있다”는 아베 요시시게(阿部善重)씨의 생전 주장에 근거한다. 아베씨는 군속(軍屬)으로 폭약 제조를 하다 1945년 패전이 되자 3인이 불하(拂下)를 받아 소장하게 되었고, 이 사실을 조총련 영화제작소장 여운각에 의해 남북한에 알려진 것이다. 2005년 사망하여 유품이 일본영상센터에 이관되어 "영화‘아리랑’ 필름이 없음이 확인되었다”고 하지만, 생전 증언에는 "영화‘아리랑’ 필름은 불하를 받은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소장했는데, 고베에 보관하고 있다”고 했기 때문에 여지가 있는 것이다. 특히 아베씨를 나봉한(나운규 선생 차남) 선생과 세 차레나 만난 바 있는 김연갑 아리랑연합회 이사장이 조사한 보고서 ‘아리랑이 보고 싶다’에 의하면 3인이 합동으로 작성한 소장 영화필름 목록은 일본영상센타에서 전혀 모르고 있다는 점에서 존재 여지는 있다고 본다. 이 문제는 다시 접근할 계기를 마련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상의 ‘일본아리랑’과 일본 속의 아리랑을 통해 한국과 일본 간에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음이 분명하다. 특히 아리랑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써 국가 간의 대화 주제임은 분명하다. 이로서 한일회담 60주년을 앞에 둔 시점에서 일본아리랑 주제 학술모임, 양국 공동 타큐멘타리 제작, 한일 교차 공연 등으로 대화를 할 필요가 있다.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 국가무형문화재 아리랑, 그리고 일본아리랑을 새로운 한일관계의 중요한 문화 자산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아리랑 정신은 대동 상생에 있다는 사실에서 주목해야 한다. 이제 공동의 실행 위원회 구성으로부터 아리랑을 통한 한일관계 교류의 힘찬 걸음을 내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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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진도아리랑답사 #진도아리랑보존회박병훈 #왕십리아리랑보존회이혜솔 #아리랑학회기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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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이름처럼 살다간 아리랑 명인 정은하http://www.kukak21.com/bbs/board.php?bo_table=news&wr_id=33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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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회 구미의병아리앙제 '국의병장 허위' 20230901"피고, 허위! 죄인이 감히, 대일본제국에게 저지른 불경한 죄를 하나도 빠짐없이 알려주겠다. 1896년 의병을 모아 대일본제국을 공격해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1907년부터 1908년까지 ‘연합의병창의군’이라는 불순단체를 결성해 대일본제국에 총과 칼을 겨누어 많은 죄를 저지른 대역죄인이다 피고, 의병을 일으키게 한 것은 누구이며 대장은 누구입니까?"(재판관) "의병이 일어나게 한 것은 이토 히로부미이며 대장은 바로 나다. 이토가 우리나라를 뒤집어 놓지 않았다면 의병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죽더라도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한 싸움은 계속 될 것이다."(왕산 허위) 대일항쟁기 구미에서 출생한 독립운동가 왕산 허위 의병장의 뜨거운 의병운동이 소리극으로 부활된다. 그가 돌아와서 의병들과 함께 '의병아리랑'을 함께 부르며 경성으로 진격한다. 진격!! 구미의병아리랑보존회(회장 임규익) 주최주관으로 제15회 구미의병아리랑제에서 배경숙 예술감독의 연출로 소리극 ‘구국의병장 허위’가 개최된다. 1부에서는 '저항의 노래', 2부에서는 '승리의 노래'로 구성되어 의병정신이 발현되는 과정과 영남인의 심성이 담긴 영남전래민요집에서 채록된 영남의 민요와 아리랑이 극의 단막과 어울어져 허위장군의 붉은 애국심을 펼친다. 구한말 대법원장을 지내고 전국 의병을 총지휘해 서울 진격을 노렸던 13도 창의군 대장 허위는 서대문형무소 첫 번째 사형수로 1908년 10월 21일 정오, 경성감옥의 교수대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당시 왕산의 나이 54세였다. 교수대에서 일본 헌병사령관도 그의 당당한 기개에 고개를 숙였다고 알려졌다. 소리극에서 허위 장군의 13년 의병투쟁을 구미의병아리랑에 담아서 허위장군의 의병정신을 기린다. 왕산의병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리리요 아리랑 어얼싸 아라리야(후렴) 1. 여봐라 우리네 대장군나셨다 13도 창의대진 군사장이시다 2. 노래하라 외쳐라 우리네 의병장 기린다 우리는 왕산허위대장군 3. 나시니 구미땅 임은동이요 서시니 경술년 30조 호령이다 4. 오얏꽃 날리는 3월이 오면 밤새도록 노래하라 그립다하여라 5. 역사는 기린다 왕산허위장군 산하가 외친다 너는 아냐고 6. 13도 넘어서 이역 만주 땅까지 창의하여 거병하니 세상이 들썩 극중 등장인물은 허위, 허훈, 허경, 이기찬, 아카시(일본 헌병사령관) 5인과 보존회 30여명이 민중들로 나와서 구미의병아리랑, 구미아리랑, 영남민요 10여 곡을 소리극으로 올린다. 올해왕산 허위 선생 115주년 추모제를 기념하기 위해 지난 광복절에는 구미의병아리랑보존회가 서울 왕산로, 남인사마당, 광화문, 안중근의사기념관을 차례로 순회하면서 '아리랑버스킹' 공연에서 왕산허위장군을 기리는 구미의병아리랑을 널리 알렸다. 임규익 회장은 내년에도 왕산로와 광화문광장에서 구미의병아리랑을 알리겠다고 전했다. 특히 사할린 동포 인무학 교수(모스크바 대학)에 의하면 "왕산허위 손자 허진 선생은 카자흐스탄 알마티 고려극장에서 극작가로 일하면서 늘 허위장군의 의병활동을 널리 알렸다. 고려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의병장이다. 당시 많은 의병들이 서울 진격작전을 실패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연해주로 이주했다."라고 전한다. 당시 유관순의사, 안중근의사, 윤봉길 의사 등은 널리 알려져있지만 허위 의병장은 구미에서만 부각되고 있는 실정이다. 당시 많은 독립운동가와 자손들이 국외로 이주하였다. 허위장군 처럼 묻혀졌던 의병운동의 자취를 발굴하고 복원시키는 작업이 시급하다고 본다. 구미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가 났네/아리랑 얼씨구 노다가세 노다가(후렴) 금오산 참꽃은 다시 또 피련마는/나를 버리고 가신님은 언제나 오려나 왕산의 충절과 용맹의 기상은/내 고향 구미의 자랑이라 2005년 배경숙의 '구미아리랑' 발표 후 창립한 구미의병아리랑보존회는 2009년부터 경상북도과 구미시 후원으로 매년 구미아리랑제 개최, 2018년 이후는 허위의병장을 기리는 구미미의병아리랑제를 개최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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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드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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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하·김연갑 《정선 아리랑》 범우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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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병하 아라라요김병하 아라라요 노을녁 광대산 화암 약수대 걸처 앉아 8월 태양 속 녹음에 넘친 한나절 소리공무원 김병하의 아라리를 들었네 소리의 어른 안비취에 머슴 이춘희며 말석의 소인을 향해 나직이 내놓은 소리 정성~ 병하~라는 음감만큼 담백하네 오르는 산길 바람 소리인듯 내리는 계곡 물소리인 듯 아리 아리리요~ 눈이 올라나~ 처연하여 눈길 서편 하늘 향하게 하고 텁텁하여 옛 동무 언약 떠올리게 하는 노래인 듯 푸념인 듯 속삭임인 듯 그대 역광에 여울지는 아리리 음표 그 후 오랫동안 입속에 맴돌다 갔네 아리 아리리 아라리요는 그대 것인가요 광대산 것인가요? 1986년 여름 정선극장 공연과 강연하던 날. 김보성 1986년 3월 1일, 2일에 우리는 참으로도 아름답고도 구슬픈 가락을 뿜어내는 정선 아라리의 고장을 찾아가는 길을 나섰다. 나는 정선 아라리의 기능보유자 김병하 씨를 전날 서울로 오게 해서 우리 집에서 같이 자고 함께 동행했다.고은 시인, 신경림 시인, 인하대 인류학과 김광언 교수 등이 강의와 안내를 맡았다. 서울대 경제학과 변형윤 교수와 서울대 서양사학과 이인호 교수도 참가했다. 연휴라서 아침 일찍 여유롭게 서울을 떠나 강원도의 전통가옥을 살펴보고 오대산의 월정사와 상원사, 평창과 정선을 잇는 비행기재를 넘어 정선으로 들어가는 코스였다.정선 아라리의 서럽기 짝이 없는 음조는 듣는 이들의 가슴을 흔들어놓는다. 김병하 씨의 정선 아라리는 우리들에게 신비감을 전해주었다.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가 질려나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몰려든다명사십리가 아니라면은 해당화는 왜 피며모(暮) 춘삼월이 아니라면은 두견새는 왜 우나아우리지 뱃사공가 배 좀 건너주게씨리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떨어진 동백은 낙엽에나 쌓이지잠시잠간 임 그리워서 나는 못 살겠네태백산맥의 그 준령을 넘으면서 우리들은 경악했다. 지금은 고속도로가 놓이고 터널이 뚫려 정선의 사람들도 쉽게 나들이를 하게 되었지만, 1980년 중후반에 우리가 찾아가는 정선은 참으로 험준한 성마령 고개를 넘고 넘는 첩첩산중이었다. 고은 시인은 말했다.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이 땅의 아들이다. 삼천리 산과 물의 대지는 내 아버지고 세 바다는 내 어머니다. 여기서 태어나서 여기서 싸우고 여기서 이룩하고 여기서 묻히는 것을 어느 것 하나 막을 수 없다. 이것이 나의 불가피성이다. 국토는 이것이야말로 민족을 다른 것으로 해체할 수 없는 삶의 항구적인 규범이다.”정선 아라리가 기원되었다는 아우라지에서 사람들은 다시 노래를 듣고 걸었다. 저 지난 시절 정선의 사람과 물건은 아우라지에서 배를 타고 영월에 이르고 다시 송파나루의 노들나루, 그리고 마포나루와 행주나루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었다. 이 땅의 인심과 풍속, 정서와 사상은 그 강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정선 아라리 기념비 앞에서 한길역사기행 일행들은 다시 김병하 씨와 그의 딸 김길자 양, 그리고 최능출 씨의 소리를 들었다. 아무리 들어도 더 듣고 싶었다. 험준한 산악으로 외지와 차단된 척박한 땅 정선 고을의 사람들은 지극히 서정적이고 질펀한 해학을 노래로 만들어 냈지만 때로는 저항적인 정신으로 진전되는 것이었다.삼십륙년간 피지 못하던 무궁화 꽃은을유년 팔월 십오일에 만발했네사발 그릇이 깨어지면은 두세 쪽이 나는데삼팔선이 깨어지면은 한덩어리로 뭉친다역사와 삶은 노래를 만든다. 정선의 국토와 민중의 삶은 500수 이상 되는 노래를 만들어내게 했다는 것이다. 이른 봄날, 정선 아라리를 찾아가는 역사가행을 통해 우리들은 이 국토가 창출해내는 노래와 정서를 가슴으로 체험하는 것이었다.(어느 출판인의 비망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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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아리랑 음반 홍보 전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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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북남 아리랑의 전설